기독교 국가사회의 탄생
유아세례의 등장과 부분적 회심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유아세례가 퍼지게 되었다. 529년 저스티니안 1세는 유아세례를 황제가 제정하는 법으로 만들었고 이것은 8세기까지 어디서든지 규범화 되었다. 유아들의 부모와 대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칠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품행이 바르지 않은 것과 세상의 기쁨에 전념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으며 5세기까지 대부분 지역의 지역교회 지도자들은 회심자들의 삶과 생활양식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되기 이전의 관점대로라면 사람들의 회심은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다. 유아세례는 이제 국가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필수 관문이 되었으며 유아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 마땅한 할 도리였다.
그러나 갓태어난 아기에게 세례를 주고 그와 동시에 아이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여기는 것은 교회와 일반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구분니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교회는 모든 사람들의 교회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14절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소수 사람들의 교제(fellowship)를 의미하지 믿음의 고백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콘라드 그레벨이 교회에 대해 새롭게 이해한 부분이었다.
국가교회 vs 자유교회
그러나 쯔빙글리는 대중을 위한 국가교회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콘라드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교회가 국가와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했다. 즉 국가의 강요나 국가의 법에 지배받지 않는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세례신앙운동이 처음 추구했던 목표였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세례가 아니라 교회에 있었다.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교제, 즉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복음을 증거하며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교제를 추구했다.
신자의 세례
이러한 새로운 교회의 절대 핵심은 참된 회심과 거룩한 삶, 제자도의 헌신된 삶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전은 태어나면서 죽을때 까지 법과 권력에 의해 국민 전체가 자동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중세 교회의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과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이었다.
재세례신자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했던 이유를 올바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국가 교회를 거부한 원인이 아니라 국가 교회를 거부하게 된 근본적인 상징에 불과했다.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가 참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삶을 헌신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이 상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이것조차도 재세례신자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삶의 서약은 할 수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아 세례는 의미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회 구성원이 되거나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데도 심각한 장애를 줄 수 있다. 오직 믿음에 기초한 성인 세례만이 의미있는 삶의 헌신을 하게 할 뿐이다.
역사적 비평
기독교 국가 사회가 도래한 것에 대하여 학자들은 콘스탄틴 황제 1세(Emperor Constantine)의 역할을 강조한다. 312년 콘스탄틴 황제는 회심했고 그리스도인들이 오랬동안 바랬던 기독교의 공인을 이끌어냈다. 그러나 이것이 정말 그리스도인의 진정한 삶의 승리까지 이어졌을까?
초대교회의 구성원이 자발적 소수였다면 이제는 강요적 다수가 되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전에는 황제의 핍박을 받는 종교였으나 이제는 황제의 보호를 받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장원인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권력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종교가 되었기에 더욱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살아가는 외국인 거주자로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국인 거주자로서의 삶의 특징은 사라지고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별다른 특징과 변화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가는 단순히 황제가 선택한 보호의 수단이었던가?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했지만 그의 중생의 과정은 생략되었다. 그는 죽기 바로 전날인 A.D 337년-기독교 공인후 25년 후) 세례 받았다.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통에 의하면 회심자들이 세례받기 위해 준비했던 교리문답 시간은 3년이었던 것이 이제는 길어야 사순절 기간 정도로 짧아졌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세례문답을 가르쳤던 교사들은 세례 지원자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의 역사와 풍습을 가르치는 것보다 정통교리와 성만찬의 신비에 대한 교육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안디옥의 요한 크리소소톰(John Chrysostom)이 실천적 제자도란 주제를 다루긴 했지만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의 교리문답 연설문은 정통(orthodoxy)에 관한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는 실제로는 중생하지 않고 단지 겉으로 보기에만 행위적인 표시 몇개의 부수적인 문장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은 거의 모든 교리적 신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두었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이 자발적 소수였다면 이제는 강요적 다수가 되기 시작했다. 기독교가 전에는 황제의 핍박을 받는 종교였으나 이제는 황제의 보호를 받는 기독교가 된 것이다. 초대교회의 성장원인이 그리스도인의 삶이 항상 호기심과 관심의 대상이었다면 이제는 권력에 의해서 보호를 받는 종교가 되었기에 더욱 안정적(?)으로 성장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자신들을 이 땅에서 하늘나라의 식민지를 살아가는 외국인 거주자로서 보았다. 그러나 이러한 외국인 거주자로서의 삶의 특징은 사라지고 이제는 그리스도인의 삶에 별다른 특징과 변화도 없는 상태가 되었다.
십자가는 단순히 황제가 선택한 보호의 수단이었던가? 콘스탄틴 황제는 기독교를 공인했지만 그의 중생의 과정은 생략되었다. 그는 죽기 바로 전날인 A.D 337년-기독교 공인후 25년 후) 세례 받았다.
초대교회의 사도적 전통에 의하면 회심자들이 세례받기 위해 준비했던 교리문답 시간은 3년이었던 것이 이제는 길어야 사순절 기간 정도로 짧아졌다. 게다가 시간이 지나면서 세례문답을 가르쳤던 교사들은 세례 지원자들에게 새로운 공동체의 역사와 풍습을 가르치는 것보다 정통교리와 성만찬의 신비에 대한 교육을 더 중요하게 생각한 것으로 보인다. 비록 안디옥의 요한 크리소소톰(John Chrysostom)이 실천적 제자도란 주제를 다루긴 했지만 닛사의 그레고리(Gregory of Nyssa)의 교리문답 연설문은 정통(orthodoxy)에 관한 색채가 그대로 남아있었다. 그는 실제로는 중생하지 않고 단지 겉으로 보기에만 행위적인 표시 몇개의 부수적인 문장에만 노력을 기울였다. 예루살렘의 시릴(Cyril)은 거의 모든 교리적 신비적인 것에 대한 관심을 두었다
유아세례의 등장과 부분적 회심
이러한 상황이 전개되면서 유아세례가 퍼지게 되었다. 529년 저스티니안 1세는 유아세례를 황제가 제정하는 법으로 만들었고 이것은 8세기까지 어디서든지 규범화 되었다. 유아들의 부모와 대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교리문답을 가르칠 수 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었다. 설교자들은 청중들의 품행이 바르지 않은 것과 세상의 기쁨에 전념하는 것에 대해 불평했으며 5세기까지 대부분 지역의 지역교회 지도자들은 회심자들의 삶과 생활양식이 크게 변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기독교가 로마제국의 종교로 공인되기 이전의 관점대로라면 사람들의 회심은 부분적인 것에 불과했다. 유아세례는 이제 국가교회의 구성원이 되기 위한 필수 관문이 되었으며 유아세례를 받게 하는 것이 부모로서 마땅한 할 도리였다.
그러나 갓태어난 아기에게 세례를 주고 그와 동시에 아이들을 교회의 구성원으로 여기는 것은 교회와 일반 사람들 사이에 아무런 구분니 없다는 것을 의미했고 교회는 모든 사람들의 교회가 되었음을 의미했다. 그러나 신약성경 마태복음 7장 14절에 의하면 교회는 그리스도를 진정으로 따르는 소수 사람들의 교제(fellowship)를 의미하지 믿음의 고백이 없는 다수의 사람들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콘라드 그레벨이 교회에 대해 새롭게 이해한 부분이었다.
국가교회 vs 자유교회
그러나 쯔빙글리는 대중을 위한 국가교회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고 그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콘라드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은 교회가 국가와 국가 권력으로부터 자유하기를 원했다. 즉 국가의 강요나 국가의 법에 지배받지 않는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원했던 것이다. 이것이 바로 재세례신앙운동이 처음 추구했던 목표였다. 그들의 진정한 관심은 세례가 아니라 교회에 있었다. 그들은 믿음에 근거하여 하나님의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함께 하는 교제, 즉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복음을 증거하며 참 그리스도인들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교제를 추구했다.
신자의 세례는 단순히 이러한 새로운 교회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외적인 표시로써 강하게 인식되었을 뿐이다. 이러한 외부적인 독특성을 추구한 이유로 쯔빙글리는 콘라드 그레벨과 그의 동료들을 개혁 성향의 운동을 통칭하는 말인 "재세례를 베푸는 자들"이라고 부르며 경멸하였다. 그러나 당사자들은 그렇게 "재세례파, 아나뱁티스트라고 불리는 것을 싫어했다. 대신에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의 전통을 따라서 서로 형제 자매라 불렀다.
제자도 이러한 새로운 교회의 절대 핵심은 참된 회심과 거룩한 삶, 제자도의 헌신된 삶에 바탕을 둔 자발적인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비전은 태어나면서 죽을때 까지 법과 권력에 의해 국민 전체가 자동으로 교회의 구성원이 되는 중세 교회의 종교개혁자들의 교회론과는 첨예하게 대립되는 것이었다.
재세례신자들이 유아세례를 반대했던 이유를 올바로 해석해야 하는 것은 바로 교회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개념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유아세례는 국가 교회를 거부한 원인이 아니라 국가 교회를 거부하게 된 근본적인 상징에 불과했다. 어떻게 갓 태어난 아기가 참된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해하고 삶을 헌신할 수 있단 말인가? 아이들이 상상 가능한 범위 내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수동적으로 경험할 수는 있겠지만(이것조차도 재세례신자들은 의구심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를 따르겠다는 삶의 서약은 할 수없을 것이다. 그러한 유아 세례는 의미 없을 뿐만 아니라 실제로 교회 구성원이 되거나 기독교의 참된 본질을 이해하는데도 심각한 장애를 줄 수 있다. 오직 믿음에 기초한 성인 세례만이 의미있는 삶의 헌신을 하게 할 뿐이다.
- 로마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국가 교회의 권력을 손에 쥔 사람들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는
재세례신앙 운동이 기독교 역사상 가장 비극적인 사건으로 평가되지만, - 아나뱁티스트란 이름으로 비난을 받았던 사람들의 역사의식과 원칙에 의하면
재세례신앙 운동이야말로 인류 역사에서 진리를 좇아 살고자 했던 믿음의 싸움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하고 중요한 운동이었다. - 재세례신앙운동은 종교개혁의 정점이었고, 루터와 츠빙글리가 처음에 가졌던 비전을 성취한 역사적 사실이다. 그것은 원래 그리스도와 제자들이 가졌던 신약교회의 비전으로서 그 무엇과도 타협하지 않고 생각과 행동을 일치시킨 복음주의적 프로테스탄티즘이다.
- 그들의 목표는 썩어 문드러져가는 국가교회로부터 참된 신자들을 불러내어 참된 그리스도인들의 교회를 명확하게
드러내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이 원래 이루려 했던 것이 바로 재세례신자들이 지체없이 실현시킨 바로 그 목표였던 것이다.
(헤롤드 벤더, 재세례신앙의 비전, p48, 50 참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