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세례신앙‎ > ‎실천적 적용‎ > ‎평화‎ > ‎

보도자료 및 글 모음

KAC의 글 모음은 수필, 논문, 시 등 자유로운 형식으로 쓰여진 다양한 쟝르의 글 나눔을 통해 교회와 기독교인이 하나님의 평화의 사도로서 사회와 세계의 화해사역에 앞장서는 시대적 소명을 감당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합니다.

보도자료 및 글 모음

  • [선교] 철저한 제자도의 실현과 평화 공동체 회복이 개혁의 정도(正道)_들소리신문 2009-10-14                               자신을 붙잡으려는 추격자가 강물에 빠지자 즉시 달려가 살려준 아나뱁티스트 더크 웰렘스.        그러나 그는 추격자에게 붙잡혀 끝내 처형당했다.  ⓒ들소리신문 루터, 칼빈과 함께 개혁의 선상에 있었던 츠빙글리의제자들이 주창했던 아나뱁티스트(재세례운동)유아세례로 ...
    2009. 10. 20. 오후 10:27에 KAC Admin님이 게시
  • 잃어버린 평화의 전통을 찾아서....               교회,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거듭나기를        YMCA 잡지<꽃들에게 희망을>에 실린글 - 이재영         지금처럼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한다. 미국 버지니아 주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조그마한 교실에 앉아 마지막 수업에 대한 ...
    2009. 9. 22. 오후 7:01에 KyongJung Kim님이 게시
  • 교회 내 갈등, 성서적 해결원칙은 있는가? 초대교회가 가진 여러 가지 정체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었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기존의 유대인이 지켜오던 율법이 아닌 예수를 통해 완성된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
    2009. 9. 22. 오후 6:57에 KyongJung Kim님이 게시
  • 파티엔티아 파티엔티아 이상규(고신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에 의해 자행될 수 있는 가장 큰 폭력이며, 파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나 도시, 자연의 파괴일뿐 만 ...
    2009. 9. 21. 오후 11:45에 hayoung an님이 게시
  • 기독교와 평화사상 기독교와 평화사상- 이상규교수의 신학읽기(5) 평화(平和, peace)는 인류가 추구해 온 가장 고상한 가치였다. 동시에 그것은 지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난해한 과제였다, 그러나 인류는 거듭된 전쟁과 폭력, 인명살상과 ...
    2009. 9. 21. 오후 11:44에 hayoung an님이 게시
  • 하나님의 평화, 미국의 평화 하나님의 평화, 미국의 평화 2002년 10월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지난해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자살 테러 공격은 전세계인을 새로운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미국은 비행기 테러 공격의 주체를 ...
    2009. 9. 21. 오후 11:43에 hayoung an님이 게시
  • 로마의 평화, 예수의 평화 로마의 평화, 예수의 평화 pax Romana, pax Christi 이상규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역사신학) 그리스도: 평화의 왕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지상의 진정한 평화를 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의 탄생을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
    2009. 9. 21. 오후 11:42에 hayoung an님이 게시
  • 기독교와 폭력, 비폭력 CrossWalk 모임2002년 10월 21일 정리 이재영 간사 (KAC) "기독교인으로써 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하여야 하는가?"라는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에 기독교인은 늘 고민하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악이라고 규정된 세력을 ...
    2009. 9. 21. 오후 11:41에 hayoung an님이 게시
  • 9.11테러 그 후: 초강대국 국민의 자격과 책임 2001년 10월이재영 "이렇게 폭력적으로 보복을 한다면 나중에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평화적인 관계형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의 무역센터를 공격하고 며칠 후에 The Town Meeting이라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중년의 ...
    2009. 9. 21. 오후 11:40에 hayoung an님이 게시
  •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많은 전쟁을 어떻게 이해 할것인가? 구약성경의 전쟁이야기에 대한 성경적 평화주의적 견해 Mennonite Central Committee, By Linda Gehman Peachey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동산에서 기도하시거나 양 때를 인도하는 또는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는 장면 ...
    2010. 6. 15. 오전 1:48에 KAC Admin님이 게시
17개의 게시물 중 1 - 10 더보기 »

[선교] 철저한 제자도의 실현과 평화 공동체 회복이 개혁의 정도(正道)_들소리신문 2009-10-14

게시자: KAC Admin, 2009. 10. 20. 오후 10:24   [ 2009. 10. 20. 오후 10:27에 업데이트됨 ]

                      
       자신을 붙잡으려는 추격자가 강물에 빠지자 즉시 달려가 살려준 아나뱁티스트 더크 웰렘스.

       그러나 그는 추격자에게 붙잡혀 끝내 처형당했다.  ⓒ들소리신문


루터, 칼빈과 함께 개혁의 선상에 있었던 츠빙글리의
제자들이 주창했던 아나뱁티스트(재세례운동)


유아세례로 자동적 신자가 된 국가 `신자는 많지만 제자 없음'을 반성-제자도 강조
가톨릭·개혁교회들로부터 박해와 핍박으로 4천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나오는 역사
신앙에 거룩한 삶 더하는 회복 중요…신앙 증표 만족 아닌 철저한 제자 삶 있어야

1517년 종교개혁이 일어난 지 492년이 지난 2009년 한국 기독교는 루터와 칼빈을 떠올리며 그 날을 기리는 예배와 행사를 한다. 그러나 교회의 모습 속에 종교개혁 사건은 남았지만 정신과 실천이 지금까지 유효한지 반문이 생긴다.

종교개혁주일을 기다리며 종교개혁의 새로운 정신을 회복하기 위해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등장했던 아나뱁티스트(재세례신앙)운동. 한국기독교인들에게는 조금 생소할 수도 있는 이 운동이지만 루터 당시대부터 오늘까지 `개혁'의 기치를 부여잡고 사는 삶을 한국아나뱁티스트센터(KAC) 김경중 총무를 통해 들어보았다.


# 세례는 제자됨의 고백


재세례신앙운동은 1525년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대중을 위한 국가교회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던 츠빙글리의 개혁 방법과는 달리 교회 개혁을 완전히 새롭게 시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강요나 법에 지배받지 않는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16세기 아나뱁티스트-재세례신앙운동이 처음 추구했던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가 유아세례를 통해 자동으로 교회 멤버십을 갖고 살아갔던 국가교회의 요구와는 달리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며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교제를 추구하였다.

세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주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수락한 신자들의 내적인 믿음과 헌신에 대한 외적인 표시로서 보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국가교회에 `신자는 많지만 제자가 없음'을 반성하고 자발적 신앙고백을 통한 좁은 길을 따르는 제자도의 삶을 살기로 선택한다.

이들에게 세례는 신자의 증표이기 보다는 제자됨의 고백이었다. 그래서 자발적 결단이 따르는 세례를 중시 여기고 유아세례를 받거나 혹은 받지 않고 성인이 된 후 자발적 결단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당시 세례는 시민권과 결부된 중요한 항목이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는 국가교회 체제하에서 주민 등록을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세금을 징수 할 수 있는 명목을 마련해주지 않는 행위였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재세례신자들의 행위는 국가의 법을 어기는 일에 해당됐다.


# 전세계적으로 160만 명 신자


결국 츠빙글리의 제자들은 교회개혁의 방향과 속도가 국가의 견해와는 관계없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주도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했고 마침내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형제단은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국가교회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이렇게 신약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시작된 재세례신앙운동은 당시의 가톨릭과 개혁교회들로부터 모진 박해와 핍박을 받기 시작했으며 16세기 이후 특정한 기독교 그룹에서 4천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배출된 인류 역사의 믿음의 선한 싸움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16세기 재세례신앙운동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이들을 토마스 뮌처를 중심으로 폭력적이고 광적인 신자들의 행위와 동일시하는 견해다. 헤럴드 벤더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은 뮌처와 같이 무력사용을 정당화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비폭력과 사랑의 윤리를 추구했던 당시의 평화로운 재세례신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아나뱁티스트-재세례신앙운동의 정통성에 전혀 못 미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오직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동체를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철저히 실천하고자 시작된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160만 명 정도가 있으며 한국 교회에는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쉬, 브래드런교회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 내적 변화 강조


그렇다면 아나뱁티스트신앙이 강조하는 것은 무엇일까?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 김경중 총무는 헤럴드 벤더의 재세례신앙의 비전(Anabaptist Vision)이란 책에 잘 나타나 있는데 그것은 제자도, 공동체, 평화로 요약할 수 있다고 했다.

첫째로 제자도는 교회와 분리될 수 없는 사안으로 이들에게 교회는 지역교회가 아닌 신자의 교회(Beliver's church)개념이다. 신자의 교회는 제자들의 공동체를 말한다. 이들의 일반적인 선교전략은 마가복음 12장 29∼30절의 말씀을 근거로 한다. 세상에 나가 만물에게 복음을 전하고, 듣는 이가 복음을 신뢰하며, 구원의 확신을 가진 이에게 세례를 준다. 그리고 참된 그리스도의 교회에 들어오게 하는 함을 선교전략으로 한다. 그렇기에 이들에겐 외적인 전도를 통한 수의 증가보단 내적인 변화에 더 큰 강조점이 있다.

둘째로 내적인 변화의 지속과 수련을 위해 공동체를 강조한다. 공동체는 물질과 시간의 나눔을 통해 다른 형제의 궁핍함을 돕고, 소유의 욕심을 버리도록 강조한다. 이 중 캐나다에 위치한 후터라이트 공동체는 사도행전 2장의 초대교회의 공동체의 모습을 지금도 실현하고 있다. 이 공동체에 있어 중요한 목적 중 하나는 “세례를 통해 제자로 살기로 결단했다면 무엇보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자신의 몸과 같이 이웃을 사랑하는 방법으로 경제적인 삶도 나누어야 한다고 믿는다”고 김 총무는 말해줬다.

셋째로 평화와 화해를 강조한다. 김 총무는 “모든 인간에게 원죄가 있기에 죄성을 부인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죄를 극복하고 짓지 않으며 살 수 있는 길을 찾는 것이 제자의 도리이게 이를 위해서는 온전한 평화인 샬롬을 실현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기에 이들은 인류의 평화로운 공존을 막고 인간을 상해하는 모든 형태의 의도적인 폭력을 반대하며,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말과 글에 의한 정신적 폭력의 사용도 반대한다. 따라서 그리스도인들이 매일의 삶 속에서 비폭력의 실천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보다 건강하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가는데 기여하고자 한다.


# 용서·평화의 삶으로 살기


한국 아나뱁티스트센터는 이를 실천하기 위해 제자도를 기초로 한 평화교육, 갈등해결, 평화를 만드는 조정자 워크샵 등을 진행하며 평화건설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하고 있고 초대교회와 같은 맥락에서의 철저한 제자도와 형제사랑의 공동체, 평화교회로의 여정에 함께 하는 한국 교회의 갱신을 돕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 총무는 원수를 사랑한 대가로 죽음의 형벌을 받아야 했던 16세기 네덜란드의 아나뱁티스트 순교자, 더크 윌렘스(Dirk Willems) 이야기를 들려줬다. 1569년 네덜란드 정부 당국은 재세례신자들을 붙잡으라는 칙령을 발표했다. 더크는 그를 붙잡으러오는 사람으로부터 얼어붙은 강을 건너 도망쳤다. 그러나 그를 따라오던 추격자가 얼음이 깨지는 바람에 차가운 물속으로 빠지고 말았다. 더크는 추격자가 물에 빠지는 것을 보자 곧장 돌아가서 그를 구해 주었다. 그는 자기를 구해준 더크의 행동에 깊이 감명 받아 그를 놓아주려 하였다.

그러나 강둑에서 지켜보던 그의 상관은 더크를 다시 붙잡을 것을 명령했다. 몇 주후 더크는 재세례파라는 이유로 처형장으로 끌려갔다. 사람들은 더크를 산채로 불태워 죽이기 위해 말뚝에 묶고 불을 붙였다. 그는 고통 중에도 “오 주님, 오 하나님”이라고만 소리쳤다.

재세례신앙 운동이 오늘 한국교회에 던져주는 메시지에 대해 호남신대 홍지훈 박사는 `재세례파와 선교'라는 논문에서 후터 마이어의 “세례는 먼저 내적세례, 외적인 물세례, 그리고 그를 따르는 고난”을 인용하며 신앙에 거룩한 삶을 더하는 회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신앙인으로서 증표에 만족하지 말고 얼마나 철저하게 제자의 삶에 참예하며 살아가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이다.

둘째는 교회와 신자가 먼저 용서와 평화의 핵으로 살아감이 필요하다. 현재 메노나이트를 중심으로 전 세계적 비폭력 운동을 일으키는 이유도 이들에게 평화와 용서는 중요한 요소이기 때문이다. 나눔과 양보, 화해와 용서가 일으키는 평화의 행진이 넘쳐난다면 실추된 한국교회의 위상은 회복될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공동체의 회복이다. 이는 욕심의 비움을 의미한다. 미국 세이비어 교회의 `서번트 리더쉽'도 교회 공동체가 지역과 마을을 섬기기 위해 성장보다는 나눔에 중심을 두며 제자도를 실현하기에 관심을 받고 있다. 결국 교회공동체에 필요한 것은 공동체가 지닌 나눔과 사랑의 회복인 것이다.

재세례신앙운동이 실천하고 지향했던 신앙의 정수들은 한국교회가 지금 무엇을 놓고 무엇을 잡아야 하는지 보여주고 있다.




황승재 기자

잃어버린 평화의 전통을 찾아서....

게시자: KyongJung Kim, 2009. 9. 22. 오후 6:58

              교회,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거듭나기를       

YMCA 잡지<꽃들에게 희망을>에 실린글 - 이재영

        

지금처럼 무척이나 더웠던 여름으로 기억한다. 미국 버지니아 주의 여름이 끝나갈 무렵 우리는 조그마한 교실에 앉아 마지막 수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실제 우리 반에는 매우 흥미 있는 사람들로 가득차있었다. 팔레스타인이 고향이지만 자유롭지 못한 땅을 떠나 시리아로 이주해간 팔레스타인 청년, 자신의 땅에서 난민이 되어버린 필리핀 민다나오 섬의 아주머니, 두 딸을 둔 눈물이 많은 코소보의 엄마, 강한 엑센트로 자기의 다리에 난 총상을 보여주던 북아일랜드에서 온 아저씨, 케냐에서 연극을 통한 평화 교육 운동을 펼치고 있는 이름이 “바보“라는 사람, 인도북부의 지역에서 독립을 위해 애쓰는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나갈랜드라는 나라에서 온 친구 아쿰....

        25명 정도였던 우리 반은 마치 전 세계의 모든 분쟁지역의 사람들을 모아 놓은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모두 개인과 사회가 다른 사연과 배경을 가진 사람들의 집합소였다. 그들 중에 나의 관심을 특별히 끄는 몇 명의 사람들이 있었다. 바로 팔레스타인에 살고 있던 20대 여성과 이스라엘 출신의 40대 아주머니, 그리고 르완다의 후투족과 투치족을 대표하던 젊은 남녀였다. 이들이 나의 관심을 끈 이유는 책과 미디어를 통해 들어온 이 두 그룹들간의 이야기 때문이었다. 늘 국제뉴스에 빠지지 않는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끝없는 분쟁과 1994년 100만 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살해당한 르완다 제노사이드의 역사는 이들과 한 공간에 함께 앉아 있는 나마져도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마지막으로 함께 했던 여름학기에 대한 소감을 말하는 시간이 되자, 늘 옆자리에 앉기를 좋아했던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에서 온 두 여자는, “우리는 지금 너무나 가까운 친구사이입니다. 하지만, 우리가 각자의 나라로 돌아가면 우리는 이제 서로를 탱크와 돌맹이 너머로 보아야한 하는 사이가 됩니다.”라고 소감을 밝혔다. 이들의 불안한 얼굴이 서로 교차하면서 어색한 미소가 똑같이 떠올랐다. 슬프고도 미안한 침묵이 교실을 한동안 떠돌아 다녔다. 그리고 다른 사람의 이야기가 끝나갈 무렵 르완다에서 온 친구들의 순서가 되자 둘은 교실 한가운데로 나와서 서로를 부둥켜 앉고 말없이 한동안 그대로 서있었다. 잠시 후 그들은, “우리는 지금 막 여러분에게 화해를 보여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진실로 화해했습니다. 하지만, 고향의 우리의 친구들은 이렇게 하지 않을 겁니다. 그것이 슬픈 현실입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자리로 돌아갔다. 이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생각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내가 무슨 말로 나의 소감을 피력했는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되새긴 기억은 난다. “부럽다. 그래도....너희들은 여기에서 만날 수는 있잖아. 우리는 50년이 넘게 서로 만나지도 못하는데....”

        그날 이후로 한동안 나는 평화와 화해라는 말을 사치스럽게 받아드리게 되었다. 서로를 향해 총부리를 들이대고도 평화와 통일을 외쳐야 하는 우리의 현실이나 중동과 아프리카의 현실이 뭐 별반 다를게 없다고 느껴졌기 때문이다. 점점 평화와 화해를 말하지 전에 우리가 뛰어넘어야 할 고정된 생각이 너무 많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다. 국가와 안보, 종교와 정치, 역사와 교육, 그리고 우리와 그들....

        평화와 화해를 이루기 위해서는 정치, 경제, 사회 등 무수히 많은 개념과 구조들이 변하고 고쳐져야 한다. 하지만 가장 근본적으로 진행되어야 하는 일은 바로 이 개념을 구조적으로 변화시킬 평화의 사람을 길어내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사람을 상해할 수 있는 폭력의 마음과 몸을 가지고 있다. 동시에 사람은 누구나 화해하고 사랑할 수 있는 평화의 몸과 마음도 가지고 있다. 무엇을 선택할 것인가는 우리 선택이다. 하지만, 선택의 책임은 모두 개인에게 달려 있지 않다. 바로 공동체에게 달려있다. 혼자서 평화로울 수는 있어도 평화와 화해를 이룰 수는 없다. 참선과 기도를 통해 평화를 느끼고 평화로움을 옆으로 전달할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평화를 만들려는 적극적인 노력은 혼자만의 노력으로는 분명 한계가 있다.

        그렇다면 지구상에서 평화와 화해를 만들기에 가장 적합한 공동체는 무엇일까? 이념적 뿌리를 같이하는 정치집단인 정당일까? 아니면, 국가간 분쟁을 조절하는 UN일까? 혹시 제3의 파워라고 하는 NGO의 연합체는 아닐까? 나는 감히 교회라고 굳게 믿고 싶다. 기독교 교회야 말로 이 땅에 평화와 화해를 만들어가기에 가장 이상적인 공동체이다. 이는 교회가 다른 세상의 기관이나 집단보다 더 우월하거나 힘이 세서가 아니다. 오히려 가장 약한 사람들의 모임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교회는 세상과 구별되어 살고자 부름받은(ekklesia) 사람들의 모임이다. 따라서 예배만을 위한 성소가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맛을 미리 보는 이 땅의 천국 대사관이다. 천국의 통치원리는 무엇인가? 다름 아닌 바로 샬롬이다. 하나님의 공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눈물과 탄식이 없는 영원한 평화만이 존재하는 곳 바로 천국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어떻게 기도할 것을 가르치면서,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지기를 소망하는 것을 포함하셨다. 하나님 나라가 이 땅에 이뤄진다는 이야기는 곧 샬롬이 통치원리가 되는 땅으로 변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우리의 이웃이 왕따와 가정폭력으로 가난과 기근으로, 전쟁과 학살로 고통당하고 죽어 가는데 어떻게 이 땅이 천국이 될 수 있겠는가? 지금을 사는 기독교인은 자신이 속한 가정, 학교, 직장, 사회, 세계 속에서 화평케하는 자(peacemaker)로의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야만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자녀라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불리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를 위해 교회가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기독교의 폭력 정당화에 공헌한 사실을 역사 앞에 고백하고 반성하는 일이다. 기독교는 폭력의 종교일 수 없고 비폭력의 예수의 가르침이자 생활방식이었다. 그를 따르기 때문에 크리스쳔(Christian)이라고 불리는 기독교인들은 반드시 예수의 실천적 생활방식을 따르고, 그가 몸소 보여준 자기희생을 통한 화해와 평화를 본 받아야만 한다. 또한 교회 안에 존재하는 분쟁과 갈등을 우선 해결하는 노력이 없이는 교회는 세상 속에서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결코 인정받을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깨달아 스스로 평화를 이루는 공동체로 거듭나야 한다.

        나에게 Y는 교회로 이해된다. Y는 기독교 신앙과 정신을 생활방식으로 변형시키고 실천해온 세상속의 빛과 소금이 되온 진정한 교회이다. 언제나 새로운 기독문화를 창출하고 이끌어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의 변화를 주도해 왔다. 여기에 한국의 청년들은 매력을 느꼈고, Y의 향기에 취해갔다. 하지만, 교회가 평화의 정체성을 잃어버리는 순간 화해의 도구가 될 수 없듯이, Y도 정체성을 지켜나가지 못한다면 향기를 잃은 꽃과 같이 되고 말 것이다. 나는 Y가 생활교회로써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거듭나기를 희망한다. 그래서 분단의 아픔을 치유하고 세상을 향한 하나님의 평화와 화해의 도구로 자리매김 하기를 간절히 바래본다.


* 한국 아나뱁티스트 센터(Korea Anabaptist Center)는 제자도, 평화, 공동체를 주제로 16세기 종교개혁 당시 정교가 분리되는 근본적 교회개혁을 요구했던 아나뱁티스트의 주장을 근간으로 초대교회의 전통을 한국교회에 다시 회복시키기 위한 노력을 하고 있다. 출판사(KAP) 운영을 통해 초대교회의 신앙특징과 전통, 공동체 교회, 기독교 평화주의에 기초한 자료를 보급하고 있으며, 학생, 교사, 교회, NGO, 기관 등을 위한 폭력예방과 평화적 갈등해결을 위한 평화교육(peace education)을 실시하고 있다. 또한, 평화의 정신과 기독교육에 기초한 영어어학원 커넥서스를 운영중이다.  자세한 내용은 www.kac.or.kr 이나 www.connexus.co.kr 을 참고.

교회 내 갈등, 성서적 해결원칙은 있는가?

게시자: KyongJung Kim, 2009. 9. 22. 오후 6:56

초대교회가 가진 여러 가지 정체성 가운데 하나는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문자 그대로 받아들이는 노력이었다. 초대교회의 구성원은 기존의 유대인이 지켜오던 율법이 아닌 예수를 통해 완성된 새로운 가르침을 따르는 사람들이었다. 예수의 가르침 가운데 오늘날의 한국 교회가 교회 내 갈등문제와 관련하여 매우 심각하게 받아들여야 할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예수는 교인들 사이의 분쟁에 대해 어떻게 대처해야 할 지 두 가지 방법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첫째는 이웃간의 화해가 하나님과의 화해의 전제조건이라는 것을 분명히 밝혀 두는 대목이다. 예수는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 들을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 앞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 후에 예물을 드리라 (마5:23-24)라고 말씀하셨다. 즉, 사람사이의 화해가 우선되지 않으면 그들이 드리는 예배는 받지 않으신다는 뜻이다. 여기서 네 형제의 개념에 대해 주목할 필요가 있다. 당시 유대사회에서 형제라는 말은 하나님의 전에 와서 예배를 드리던 동료 유대인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던 말이다. 따라서, 예수에 의해 새롭게 정립된 율법의 적용범위는 비단 가족이나 가까운 사람들 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함께 신앙생활을 하는 교인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 원수 된 자(너를 송사하는 자, 마5:25)까지도 화해하라는 분명한 명령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형제간의 화해가 우선될 때에만 예물을 받으시는 하나님임을 기억해야 한다.

둘째로 교회 안에서 잘못을 범한 신자에 대해 교회가 어떠한 입장과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해야 할지 제시하는 부분이다. 예수가 제시하는 방법은 당사자간의 문제해결을 가장 우선시한다. 즉, 다른 사람들에게 누구에 대한 험담이나 오해의 소지가 있는 말을 퍼뜨림으로써 상대를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 아니라, 용기 있게 직접 대면하라는 것이다.(마18:15) 이런 용기 있는 대면은 그 자체만으로 상대와 더 큰 관계상의 갈등을 겪을 위험이 있기에  한가지 원칙을 반드시 지켜야 한다. 우리가 상대를 상처주기 위해 대면이 아니라 다시 얻기 위해 사랑으로 직접 대할 때 비로소 화해와 회복이라는 놀라운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 이러한 순수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해결되지 않을 때 차선으로 선택될 수 있는 방법을 성경은 다른 이들, 더 나아가 교회 전체가 나서서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해야 한다고 가르친다.(마18:16-17) 그럼에도 해결되지 않을 때 취해야 할 단계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 같이 여기라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을 살펴보아도 이방인이나 세리는 예수가 가장 열심히 품으려고 했던 부류의 사람들임을 알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는 이야기는 어쩌면 다시 품고 사랑해야 할 대상이라는 말과 같다. 그래서 아마도 베드로의 연이은 질문에 예수는 일흔번씩 일곱번이라도 형제를 용서하라(마18:22)고 한 것인지도 모른다.

간혹 교회 안의 분쟁과 갈등이 언론의 가십거리 정도로 취급되는 씁쓸한 오늘날의 한국교회의 현실을 바라보며 안타까움을 금치 못하는 한편, 과연 교인간의 갈등을 성서적 관점에서 풀 수 있는 원칙과 능력이 한국교회에게 있는가 반문하게 된다. 혹시 우리는 은혜가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또는 직접 대면하는 것에 대한 불편함 때문에 교회에서 형제, 자매들간의 갈등이 증폭되는 위험한 암을 키우고 있지는 않은가? 지금이라도 교회 내에서 교리교육과 더불어, 교회 내 문제를 성서적 원칙과 함께 어떻게 대처해야 할지 고민하고, 건강한 평화적 갈등해결을 위한 노력이 시작되고 훈련되어야 한다. 이것이 바로 교회의 평화 정체성회복의 첫걸음이다. 이런 노력 없이 분쟁과 갈등으로 나뉘어진 한국교회가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감당할 수 없음을 우리는 직시해야 한다.

 

이재영-목회자신문 2005

파티엔티아

게시자: hayoung an, 2009. 9. 21. 오후 11:44

파티엔티아

이상규(고신대학교 교수, 역사신학)

인류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는 전쟁이다. 전쟁은 인간에 의해 자행될 수 있는 가장 큰 폭력이며, 파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간이 이룩한 문명이나 도시, 자연의 파괴일뿐 만 아니라 인간성 자체의 파괴이기도 하다. 오늘의 세계는 지구상의 전 인류를 파고기하고도 남을 만큼의 충분한 양의 살상무기를 보유하고 있고, 핵무기의 파괴력은 고전적 의미의 전쟁 개념을 무의미하게 한다. 이제 문제는 공존(共存)이냐 무존(無存)이냐의 문제일 뿐이다 호모 호미니 루프스(Homo homimi Lupus), 곧 "인간은 인간에게 이리이다"는 라틴어 경구는 전쟁사에서 얻은 체험적 경구일 것이다.

그런데 초기 기독교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주의적 입장을 견지해왔다. 기독교는 인간생명의 천부적 가치를 인정했고, 생명의 존엄성만이 아니라 지상에서의 평화로운 삶을 중시해왔다. 기독교는 전쟁만이 아니라 어떤 형태의 폭력이나 미움, 보복, 앙갚음까지도 반대해 왔다. 이런 기독교 전통은 근본적으로 예수님의 가르침에 속에 나타나 있다(마5:39, 44, 눅6:27ff. 35 등). 예언자들의 말씀도 무력사용을 반대하는 근거로 이해했고(호7:11, 사30:15-6),평화로운 세계에 대한 비젼(사2:4, 미4:3-4)을 중시했다. 이런 정신들은 '샬롬'이라는 용어속에 이미 잘 나타나 있다. 히브리어 '샬롬'은 흔히 평화라고 번역되지만, 그것이 단지 전쟁이 없는 상태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안녕', '복지', '온전함'과 '완전함', '공의와 질서' 등 인간의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에서 누릴 수 있는 최선의 상태를 의미했다. 초기 기독교인들은 탄압을 받았고, 폭력을 당했으며, 폭력에 동참하도록 강요당했고, 전쟁에 동원되기도 했다. 그러나 기독교 신자들은 폭력으로 자기를 방어하거나 비폭력의 원칙을 포기하기보다는 자기 희생의 길을 갔고, 때로는 죽음을 선택했다.

흥미로운 사실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격렬한 수난에 직면했을 때 폭력에 대한 특기할 만한 대안을 선택했다는 점이다. 라틴어로 저술활동을 했던 초기 교회 지도자들은 이러한 태도를 파티엔티아(patientia)라고 불렀다. 영어의 인내(patience)라는 용어가 이 단어에서 기원하지만, 인내라는 의미는 라틴어 파티엔티아의 의미를 충분히 전달하지 못한다. 파티엔티아라는 용어는 악행자에게 폭력을 행사하지 않으면서도 악에게 저항하는 확고 부동한 인내를 의미한다. 이 의미가 요한계시록 13:10과 14:12에서 인내(endurance)로 번역된 단어이다. 악하고 파괴적인 압박과 박해에 대한 확고하고도 영구적인 저항의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어떤 형태의 폭력도 기독교신앙, 곧 사랑과 배치된다고 믿었다. 이 사랑의 힘은 미숙한 힘에 의존할 필요성으로부터 해방시켜 주었다. 그들은 비록 폭력적인 사회에 살았지만 어린 양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가 자기들 편에 있음을 확신했다. 그래서 그들은 전쟁이나 폭력, 보복, 앙갚음보다는 악에게 길이 저항하는 길을 선택했던 것이다. 이런한 태도는 그리스-로마사회의 가치와 첨예하게 대립되었다. 후일 터툴리안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확고부동안 인내, 곧 악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을 좀더 조직적인 방법으로 발전시켰다. 그는 그의 변증(Apology)에서 "기독교인들은 죽이는 것보다는 죽임을 당할 자유가 더 많이 주어질 것이라"고 하면서 자기 희생적인 비폭력을 주장했다. 전쟁은 또 다른 전쟁을 낳고, 폭력은 또 다른 폭력을 낳고, 보복과 앙갚음은 끊임없이 반복된다. 그래서 그것이 문제 해결의 첩경일 수 없다는 초기 그리스도인들의 확신은 비폭력적 저항을 가르치신 주님의 교훈에서 얻은 논리적인 결론이었을 뿐이다.

이번에 미국이 입은 테러의 상처는 그 어느 것 보다 크다. 그러나 응징과 보복이 최선의 길은 될 수 없다. 전투기 1대의 1회 공습에 50만불이 소요된다면, 적어도 전투기 100대가 필요하고 하루 3번 출격한다고 보았을 때 하루에 1억 5천만불이 소요된다는 계산이다. 되지도 않을 여유라고 생각하겠지만, 엄청난 인명피해와 재산상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이 거금으로 테러방지와 평화를 위해 투자하겠다고 선언한다면 미국은 군사력으로 얻을 수 없는 최강국의 지도록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다. 영국의 시인 콜리지(S. T. Coleridge)의 말은 진실이다. "평화는 세상의 모든 축복 중에서 가장 가치있는 것이다."

기독교와 평화사상

게시자: hayoung an, 2009. 9. 21. 오후 11:43

기독교와 평화사상- 이상규교수의 신학읽기(5)

평화(平和, peace)는 인류가 추구해 온 가장 고상한 가치였다. 동시에 그것은 지상에서 실현할 수 있는 가장 난해한 과제였다, 그러나 인류는 거듭된 전쟁과 폭력, 인명살상과 상실, 자연의 파괴와 같은 엄청난 재난을 경험했다. 1차 대전과 같은 대규모의 국제적인 전쟁을 경험 한 이후 서구에서는 반전(反戰)운동과 반전사상이 일어났고, 평화에 대한 학문적 연구가 시작되었다. 이것은 기독교권에서 계속되어 왔던 평화주의(Pacifism)사상과 더불어 1920년대 이후 서구사회에서 중요한 사회과학의 한 분야로 발전했다. 그 후 평화학(Peaceology)은 학제간 연구의 주제가 되기도 했다. 제2차 대전 이후 세계 평화에 대한 갈망은 국제연합, UN과 같은 국제기구 창립의 동기가 되었고, 세계교회 협의회(WCC) 또한 평화에 대한 염원에서 발의된 교회협의체였다. 2차 대전 이후 서구학계에서 평화에 대한 연구는 상당한 발전을 가져왔고, 수많은 연구물들이 출판되었으며, 주요 대학에는 평화연구소나 유관 기관, 기구들이 창립되기도 했다.

서구에서의 경우, 평화사상, 혹은 평화운동은 근원적으로 기독교 사상에서 시원(始原)하였고, 발전하였다.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의 화평케하는 자(peacemaker)란 라틴어 pacifici 인데, 이 말은 넓은 의미로 평화를 위해 일하고 투쟁. 피흘리, 전쟁을 없애기 위해 싸우는 이들을 의미하지만, 좁은 의미는 군복무를 반대하는 이들을 의미했다. 그런데 이 반대 이념을 예수님의 가르침에 근거한 이들을 기독교평화주의자라고 부른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는 비폭력 평화주의를 지향했음은 하르낙(Harnack), 캐둑스(Cadoux), 헤링(Heering), 헐스버그(Hershberger)의 연구를 통해 분명히 제시되었다. 폴리갑(155년경)은 빌립보인들에게 악에게 대항하지 말라는 베드로의 말씀(벧전2:23)에 순복하라고 했고, 180년경 변증가 아데나고라스는 동일한 취지의 기록을 남겼다. 분명한 증거는 174년 테르툴리안의 그리스도인들은 군복무를 할 수 없다는 보다 강력한 권면속에 나타나 있다. 군인이 신자가 되었을 경우 즉각적으로 군복무를 그만두던지, 순교자가 될 각오를 해야 한다고 보았다. 실지로 신자가 된 이들이 군복무를 포기했다고 했다. 2세기 후반기 이교도 셀수스(Celsus)는 기독교도를 비판하면서 비전(非戰)은 제국의 멸망을 가져올 것이라고 했다. 258년에 순교한 키푸리아누스는 사람을 죽이는 살인은 범죄로 간주되지만 국가라는 이름으로 행하는 살인은 용기로 간주된다"고 비판했다. 4세기 역사가 유세비우스는 기독교인이 군복무를 거부했던 사례를 소개하고 있는데, 막시밀리안(Maximilian)이라는 21살의 누미디아 출신의 청년은 군복무를 거절한 이유로 295년 3월 12일 사형에 처해졌다.

이러한 비전, 반전 전통과는 달리 콘스탄틴의 개종(312년)과 공인(313)이후 기독교는 제국의 종교로 화하면서 엄청난 변화를 겪게된다. 반전, 평화사상은 힘이 약화되기 시작한다. 350년 경 아다나시우스는 "살인은 허용되지 않는다. 그러나 전쟁에서 적군을 죽이는 일은 합법적이며, 칭송받을 일이라"고 했다. 25년 이후 암브로스는 "야만인들에 대항하여 고향을 지키고, 가정에서 약자를 방어하고, 약탈자로부터 자국인을 구하는 싸움은 의로운 행위"라고 보았다. 이런 과정을 거쳐 어거스틴(354-430) 때 와서 그리스도인의 참전권은 의로운 전쟁론으로 조직적으로 정당화되었다. 기독교가 380년 국가종교가 된 후 기독교의 비저항적 태도는 416년에 와서 완전히 전위되었다. 황제는 모든 군인들은 기독교신자가 되어야 한다고 공표했던 것이다. 불과 1세기만에 기독교의 입장은 완전히 변화된 것이다. 이것을 헤링은 기독교의 타락(fall)이라고 불렀다.

그후 16세기 종교개혁과 함께 재세례파 구룹들을 통해 평화사상이 다시 일어나기 시작했다. 313년 이전으로 돌아가는 복귀(restitution)를 개혁의 이념으로 여겼던 재세례파에 있어서 콘스탄틴 이전의 초대교회의 비폭력, 비전사상은 제자적 삶의 당연한 태도로 간주되었고, 오늘날의 평화운동의 기독교적 전통이 되었다. 북미나 유럽의 경우, 특히 '평화를 지향하는 교회들'(Historic Peace Churches)은 평화연구를 보다 근원적으로 이념-사상적 혹은 종교적 측면에서 연구하여, 비폭력(non-violence), 화해(reconciliation), 앙갚지 않음(un-retaliation), 기독교적 사랑(Christian love)의 실천을 통해 세계 평화를 지향하는 여러 운동을 전개해 왔는데, 이런 일련의 운동이 오늘의 절대적 평화주의(absoluter Pazifismus) 사상의 연원이 된다.

한국은 거듭된 외침과 19세기 이후 일본, 러시아. 중국과 같은 인접국간의 분쟁과 대립 속에서 전화를 경험하였고, 특히 한국전쟁의 참화를 경험하였으나, 우리 나라에서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심각하게 연구되지 못했다. 비록 '평화' 라는 말은 수없이 사용되었으나 정치적인 구호에 지니지 않았고, 실제적으로 평화에 대한 연구가 심도있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사실상 남북이 대치하고 있는 상황에서 평화공존이나 반전(反戰), 비핵 비폭력, 혹은 평화에 대한 논구 자체가 반 국가적인 행위인 것처럼 오인되는 현실에서 평화추구는 반체제적 이념운동으로 간주되었던 것이다.

독일의 평화운동가이자 평화학자인 바이재커는 "오늘과 같은 과학기술 시대에 있어서 평화란 곧 삶의 조건이다." 고 했는데, 평화는 어떤 것이라고 정의하기 전에 그것이 없으면 생존이 곤란해지는 환경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분단상황에서 남북간 상호 적대적 상황에 있는 오늘 한국에 있어서 전쟁이 없는 비전(非戰), 비폭력의 평화적 공존만이 아니라, 비무장운동, 반핵운동, 혹은 적대적 미움의 제거, 화해와 공존의식, 지역간 종교간의 갈등의 해소를 통해 진정한 '평'(平과)과 '화'(和)를 추구하는 것이 평화이다.

하나님의 평화, 미국의 평화

게시자: hayoung an, 2009. 9. 21. 오후 11:42

하나님의 평화, 미국의 평화

2002년 10월

이상규 교수(고신대학교)

지난해 9월 11일, 미국 뉴욕의 세계무역센터에 대한 자살 테러 공격은 전세계인을 새로운 전쟁의 공포에 사로잡히게 만들었다. 미국은 비행기 테러 공격의 주체를 오사마 빈 라덴이 이끄는 알-카에다로 이슬람 과격 무장 단체로 지목하였다. 그리고 미국은 곧바로 테러에 대한 보복을 다짐하고 불리는 구체적인 증거없이 힘없고 가난한 나라 아프가니스탄을 향하여 '정의로운 전쟁'을 선포, 감행하였고 지금은 그 범위를 더 넓게 확대하려 하고 있다. 한편 미국은 이번 전쟁을 반테러 전쟁으로 규정하고 자국에 대한 공격을 문명 대 반문명 세력 간의 전쟁으로 표현하고 있다.
이와같이 미국에 의한 전쟁이 정당화되어 거대한 폭력으로서 지구 전체를 뒤덮고 있고 그로 인하여 모두가 신음하며 탄식하고 있다는 것은 오히려 역설적으로 하나님의 샬롬의 회복을 갈구하는 것을 상징하는 언어일지도 모른다.

따라서 이번 미국의 보복 전쟁의 성격과 요인에 대한 분석과 전망을 통하여 총체적이며, 우주적인 하나님의 샬롬의 임재를 기대하며 성경이 말하는, 신학이 말할 수 있는 평화의 의미를 더듬는 일은 중요하다.

1. 미국의 평화

*지난 9월11일 미국에 대한 자살 테러가 일어난 요인

작년 9월11일 테러 공격과 관련된 몇 가지 의문점을 제기해 볼 수 있다. 먼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왜 미국을 공격 대상으로 하였는가 하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몇가지 요인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선 이슬람의 반 유다주의, 특히 반이스라엘 전선 문제가 그 하나의 해답이 될 수 있다. 곧 전세계 맹주로 자처하는 미국이 중동 분쟁에서 일관되게 이스라엘을 지원하고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반이스라엘 무장 단체들의 공격 대상이 되고 있다는 분석이다.

두 번째는 반기독교, 반서구주의를 표방하기 위해 상징적으로 기독교 문명과 서방세계를 대표하는 미국을 공격한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공격으로써 테러 집단들이 노리는 것은 반미 공동 연대, 반기독교 공동 연대, 반서방 공동 연대를 자극하고 그들의 단결을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이다.
세 번째는 반자본주의 또는 자본주의적 근대화에 반대하기 위하여 자본주의 세계화를 이끌고 있는 미국을 공격 대상으로 한다는 분석이다. 자본주의는 기술 문명을 시장제도와 결합시킴으로써 인류 역사상 가장 찬란한 경제적 성과를 가져오고 있다. 그러나 자본주의적 근대화는 여러 가지 부작용과 문제점을 가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테러 조직들은 이러한 점을 노려서 자본주의의 상징탑인 세계무역센터를 공격 대상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항공기 테러 사건이 서방세계 국민들의 테러에 대한 공포심을 확산시켰다는 점은 분명하지만 테러 주체들이 노리고 있었던 전략적 성공을 가져온 것은 아니었다. 그들이 반문명, 반미, 반자본주의적 세계 연대 구축을 지향했다면 그것은 명백히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그러한 점에서 그들의 테러 공격은 허무주의적이다. 그러한 허무적인 공격은 일반적으로 절망적인 조건에서 시도된다.

우선 테러를 지지하고 있는 국가들의 실태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알-카에다 요원들을 양성하는 군사 기지를 제공하고 있는 수단은 전세계 나라 가운데 가장 가난한 나라이다. 소말리아는 무정부 상태가 지속되고 있고 경제는 최악의 상태이다. 아프가니스탄은 구소련의 지배와 10년 전쟁이 끝나고 서방세계들의 전략적 관심이 멀어지고 난 뒤 내전과 종교적 폭력이 지배하고 있던 최극빈 국가이다

9.11테러의 진정한 원인은 '가난'이 '풍요'에 대한 증오심을 폭발시킨 것으로 보아야 한다. 세계적 가난은 세계적 풍요의 그늘이다. 세계화 성공의 축포는 가난한 국가들의 상대적 박탈람을 더욱 조장시키고 있다. 서방 세계의 자만과 멸시, 그리고 무관심은 소외된 사람들의 소외감과 증오심을 자극하고 있다. 다이어트 산업이 번창하고 얼굴 성형 산업이 수조 원대의 시장을 형상하고 있는 사회가 있는 반면, 12세가 넘은 여자 아이들을 학교에서 쫓아내고 옥수수 몇 알을 훔쳐먹은 사람들을 공개 처형하는 사회가 있다.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무차별 폭격을 생각하며- 빛과 어둠의 갈등인가?

아프가니스탄에 대한 미국의 무차별 폭격은 국제질서 혹은 문명질서의 유지를 위한 정의로운 전쟁인가? 미국과 회교권 과격분자(이라크, 리비아, 그리고 탈레반 세력)의 갈등을 선악, 빛과 어둠의 갈등으로 보는 것이 온당한가?

많은 미국의 우익적/애국적시민들(대부분 보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이에 편승하는 한국의 언론들도 아주 빈번하게 미국의 적을 곧 정의와 질서의 적, 다시 말해 어둠과 혼돈의 세력이라고 보려는 경향을 드러낸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지극히 자기중심적인 해석일 뿐이다.

왜 미국은 전세계의 테러조직체들을 문명세력에 대한 적대세력이라고 단죄하고 자신을 문명질서의 수호자로 자임하며 나아가 선악간의 판단행위를 독점하려는 것일까? 잘 알려진 바대로 국제 분쟁에 대한 미국의 경찰국가적인 간섭과 군사력 행사는 미국의 신학적인 자기 정체성에 있다.
많은 정치학자들과 이를 뒷받침하는 보수신학의 저류에는 미국이라는 나라가 새로운 세계질서의 수호자 역할을 해야 한다는 집단의식이 흐르고 있음을 주목한다.

예를 들어 미국 신학자인 라인홀드 니이버는 (도덕적인간과 비도덕적 사회)라는 책에서 집단과 집단 사이에서 통하는 최고의 윤리는 사랑이 아니라 공의라고 주장한다. 어떤 단체가 현실세계에서 진정으로 사랑을 실천하는 선한 세력이 되기 위해서는 물리적 강제력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한다. 선함의 완성은 힘의 구비에 있는 것이다. 라인홀드 니이버의 기독교적 현실주의는 특히 2차 세계대전 이후 미국 국무성의 대외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또한 미국은 이사야2장에 나오는 야웨의 보좌를 대표하려는 유사 메시야적 사명감을 가지고 국제 분쟁에 개입한다. 그러나 사회과학적인 상상력을 동원해 보면 이런 신학적이고 현실정치적인 사명감과 짝을 이루는 하부 구조가 미국의 거대한 군수산업이라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군산정 복합체라는 정치구조는 미국의 대외간섭적인 입장을 충실하게 떠받치며 호혜적으로 제휴한다. 미국의 군수산업이 상시적으로 가동되는 산업이 되기 위하여서는 세계의 어디에선가 무기 수요를 발생시키는 전쟁들이 일어나야 한다. 미국의 국제 분쟁의 개입은 이런 이중적인 계산과 맞물려 있다. 미국은 현재 국민 총생산의 0.07%인 100억 달러를 해외에 원조하고 있는데 2000년도 미국의 군사비 총액은 미국 국내 총생산의 3%로 냉전 시기보다는 줄어든 2,000억 달러를 조금 웃돌고 있다. 그러나 2002 회계 연도 안보 예산 지출 요구액은 3,000억 달러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금액은 전세계 군사비 지출 30%에 해당하는데 러시아, 중국, 일본, 영국, 프랑스 등 나머지 상위 5개국의 군사비 총액을 합친 액수보다 많다.

새로운 세계 평화는 전략적으로 미국이 주도하는 평화를 의미한다. 미국은 자본주의적 세계화와 군사적 패권을 추구한다. 이 두 가지 조건은 미국이 말하는 평화의 기본적 원칙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평화의 원칙에 도전하는 세력은 미국의 보복을 받게 될 것이다.

2. 하나님의 평화

평화란 무엇인가? 특별히 기독교 성서가 요구하고 있는 하나님의 평화란 무엇인가?
평화는 여러 가지 용어로 표현되는데, 히브리어 '샬롬, 아랍어'살람', 헬라어'에이레네', 라틴어'팍스', 그리고 중국어'평안'등이다. 샬롬은 단순히 전쟁이 없는 상태를 가리키는 소극적인 개념이 아니라 건강하고 온전한 상태를 가리키는 적극적 개념이다.

*평화는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으로부터 시작한다.

폭력은 대체로 자신의 이익이나 욕망에 사로잡혀 타자의 입장에 서지 못한다. 타자의 아픔은 더더욱 공감하지 못한다. 이로 인하여 분노와 복수와 증오는 깊어지고 복수는 복수를 낳고 전쟁은 전쟁을 낳는다.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을 평화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애굽에 있는 내 백성의 고통을 정녕히 보고 그들이 그 간역자로 인하여 부르짖음을 듣고 그 우고를 알고...하나님은 이스라엘의 고통과 신음소리를 들으시고 그들의 아픔을 이해하고 응답하셨다.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은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생명이 있다는 것은 살아있음이며, 모든 생명이 있는 것은 살고자 한다. 생명을 상실케하는 폭력은 죄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생명의 존중을 명령하고 있다.

생명, 그것은 우리가 매우 존중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다. 오늘날, 평화로운 세계를 위한 하나의 발걸음은 타자의 아픔에 대한 공감적 인식으로부터 나오는 생명에 대한 외경이다.

* 평화는 절제와 제한과 타자의 가치인정을 요구한다.

절제 없는 인간의 욕심은 결국 인간을 파국으로 몰아갈 것이다. 절제는 샬롬을 회복하기 위한 인간의 기본 전제이다. 이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와 함께 나는 무엇을 하지 말아야 하는가도 동시에 생각하여야 한다. 화해는 자기제한과 절제로부터 타자의 인정으로 나아가야 한다. 타자를 인정하고 받아들일 때에만 화해와 평화가 존재하게 된다.

평화는 비폭력과 폭력의 없음의 상태를 의미한다. 기독교의 참된 정신은 비폭력이다. 폭력의 사용을 통한 평화는 위장평화이며 강요된 평화이지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비폭력 정신에는 힘을 가진 자의 자기 제한이나 절제가 필수적이다. 악을 악으로 갚는 것은 평화가 아니다. 이것은 다만 증오일 뿐이다. 증오는 참된 평화를 만들어내지 못한다. 악을 선으로 이기는, 원수 사랑의 정신이 바로 평화의 정신이다.

* 평화의 근거는 예수그리스도 이다.

참된 평화의 근거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의 성육신은 이땅에서의 하나님의 평화 사역의 시작이다. 그는 삶속에서 육체적, 영적, 정신적,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억압과 소외속에 있는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과 평화를 선포하였다.

그의 십자가와 부활은 하나님과 인간과 자연의 화해와 평화를 성취하셨다. 십자가는 억압과 단절과 죽음의 폭력으로부터 우리를 자유케 하시는 평화를 위한 것이었으며 부활은 영원한 평화의 희망의 선취적 사건이었다.

그러므로 바울은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화평케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또 오셔서 먼데 있는 너희에게 평안을 전하고 가까운데 있는 자들에게 평안을 전하셨으니(엡2:14-17)라고 선언하고 있다.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화해와 평화사역은 자연을 포함한다. 하늘과 땅에 있는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부활사건을 통하여 화해되어진다. 단순히 인간에게만 해당하는 것이 아니다. 모든 피조물들이, 즉 하늘에 있는 것이나 땅에 있는 것이나, 모든 것이 하나님의 화해의 사역속에 있음을 성서는 말하고 있다(골1:20). 만물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그리스도를 위하여 창조되었고 모든 것이 그리스도를 통하여 화해되었다.
그리스도의 화해의 사역은 인간과 인간사이에, 인간과 자연사이에, 인간과 하나님 사이에 평화를 이루고 샬롬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모든 것에 평화를 수여하시는 분이다.

*진정한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이다.

예수는 이웃을 사랑할 뿐 만 아니라 원수까지도 사랑하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그 자신이 자신에게 폭력을 가한 자들의 용서를 빌면서 십자가에서 죽어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전에서 물건을 매매하는 자들의 상을 뒤엎어 버리셨다. 당시의 정치, 종교지도자들을 비판하였다. 이것은 예수의 평화적 이미지와 다른 것이 아닌가? 아니다. 이것은 의로운 분노의 사건이다. 불의와 평화는 양립할 수 없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정의와 평화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분리되어 있다면 그것은 참된 평화가 아니다. 그래서 로마서 14:17은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의로움과 평화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의가없는 위장된 평화를 인정할 수 없었다. 이는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처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6:13-14) 정의없는 평화를 말함은 거짓이다. 사회적 약자와 정치적으로 억압받는 자를 배려하지 않는 평화, 파괴되어진 하나님의 피조물을 배려하지 않는 평화, 미래 세대를 배려하지 않는 평화, 달리 말해서 소수만이 특권처럼 누리거나, 신음하는 자연은 내버려둔 채 인간의 복리 만을 추구하거나 자신의 세대만의 안녕을 추구하는 평화는 정의로운 평화가 아니며, 이는 참된 평화가 아니다.

무엇보다도 성경이 비판하고 있는 것은 종교적 위장 평화이다. 평화 없는 자들, 상처받은 이들의 상처를 진정으로 치료하지 않으면서 샬롬, 샬롬이라고 외치는 종교지도자들의 위선을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정의는 눌림을 당한 사람들이 정의가 실현되었다고 인정할 때 비로소 이루어지는 것이지, 제1세계가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제임스 콘은 말한다. 성서가 말하는 평화(샬롬)는 바로 정치적으로 억눌림을 당한 사람들이 정의에 입각하여 인간성을 다시 찾고, 정치적인 구조가 변하여 정치적 탄압을 하지 아니하는 상태를 말한다.

즉, 힘 있는 자가 힘 없는 자를 힘으로 억압하고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자를 착취하고 강대국들이 막강한 군사력을 가지고 약소국을 착취하여 제국을 이루고 그것을 오히려 세계평화를 이루었다고 주장하는 역상의 현장에서, 약자들을 위한 정치적인 평화, 가난하고 없는 자들과 군사력이 없는 민족과 나라들이 탈취당하지 않고 식민지가 되지 아니하게 하는 정의가 있는 세계정치적 평화를 말하는 것이다.

3. 평화를 위한 교회의 과제

성경은 하나님과 이웃의 이익보다 자신을 중심에 놓고 우선시하는 태도를 죄라고 규정한다. 타자의 아픔을 공감하지 못하여 벌어지고 있는 국제간의 전쟁과 갈등은 가장 포괄적으로 말하면 하나님을 반역한 인류가 자구책으로 강구하는 전형적인 죄악인 셈이다. 교회는 전쟁이 한 나라가 다른 나라에게는 생명의 경외 없이 죽음(노예화)을 강요하고 자신에게는 안식과 평화를 확보하려는 가장 야만적인 행위이므로 지금 미국이 말하는 정의로운 전쟁은 절대로 정당화 될 수 없음을 선포해야 한다.

기독교적 평화는 군사적 힘을 통해 이루어지는 안정과 질서가 아니다. 고대 로마제국의 Pax Romana 세계경찰국가로서 미국의 Pax Americana는 한편에서의 안정 뒤에 다른 편에서의 희생과 눈물과 분노가 있는 강요된 평화에 불과하다. 따라서 교회는 미국처럼 탁월한 무기와 군사력이 있어야 나라의 안전과 평화가 보장된다고 강조하면서 무기 개발과 방어 체계를 확립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하는 힘의 논리와 사고에 에 맞서야 한다.

교회 교육의 핵심은 평화를 가르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역사적으로 끊임없는 전쟁 속에서 살아온 인류에게 평화를 이룩하시기 위해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신 까닭이다. 예수님의 탄생을 축하하던 천사들과 목자들은 '하늘에는 영과, 땅에는 평화'를 찬양하였다. 예수는 전쟁과 투쟁의 왕이 아니라 평화의 왕으로 오신 것이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되라고 하는 성서의 명령은 열강의 압제에 대하여, 그리고 불의한 억압을 '체념'하고, '한숨'지으면서 사는 것이 평화라고 하는 것은 전연 아니다. 평화를 만드는 자가 된다고 하는 것은 적극적으로 행동하여서 평화를 쟁취하는 사람으로 살라는 말이지, 체념형 인간, 무조건적 적응형의 인간, 한숨형의 인간이 되라고 하는 것과는 전연 다른 것이다.

평화는 정의와의 관계에서 두 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그 첫째는 정의 없는 평화요, 둘째는 정의로운 평화이다. 미국이 주장하는 평화는 제3세계의 정의를 파괴시키고 박탈함으로써 실현된 평화이다. 이러한 정의없는 평화를 진정한 성서적 평화라고 볼 수 없는 것이다. 전쟁을 일으켜 아프가니스탄을 전쟁의 소용돌이로 끌어넣었으면서도 그들의 목표는 '세계평화'를 실현한다고 하였으니, 이는 거짓평화, 위장평화의 논리를 가지고 세계졍복의 야욕을 숨겨보려 한 것에 불과한 것이다.

평화란 단순히 무력충돌을 하는 전쟁이 벌어져 있지 아니한 상태만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불의한 정치, 경제, 사회적 구조에 의하여 억눌림을 당하고 있지만 무력투쟁으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눌린 자들이 침묵하고 참고 견디는 상태도 평화는 깨어진 상태인 것이다.

따라서 (제3세계의) 교회는 평화교육을 통하여 바로 위와 같은 평화가 파괴되어진 상태를 진단할 줄 알도록 하는 '평화진단'의 기준들을 가르쳐야 한다.

*참고서적
노정선 저. 통일신학을 향햐여. 한울
장로회 신학대학 기독교교육연구원. 교육교회. 2002, 1
한국성서학연구소. 성서마당. 2002,1
기독교사상 2002,1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 사목. 2002.2
녹색평론 2002년 1-2월
창작과 비평 2001년 겨울

로마의 평화, 예수의 평화

게시자: hayoung an, 2009. 9. 21. 오후 11:42

로마의 평화, 예수의 평화 pax Romana, pax Christi

이상규 (고신대학교 신학과 교수, 역사신학)

그리스도: 평화의 왕

예수그리스도의 탄생은 지상의 진정한 평화를 주는 사건이었다. 그래서 누가는 예수의 탄생을 "하늘에서는 영광이요, 땅에서는 평화"라고 했다(눅2:14).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오셨다. 선지자 이사야는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나타난 평화의 시대를 예고했다.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하던 자에게 빛이 비취도다. .....이는 우리에게 한 아기가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prince of peace)이라 할 것임이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사9:2-7).

샬롬 (Shalom)

'평화'라는 용어와 그 파생어는 신약에서 100회 이상 나온다. 우리말 성경에는 평화, 평강, 화평 등 각기 다른 번역이 있지만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찌어다"(Peace be with you, 눅24:30, 요20:19,21,26), "평강의 하나님" 등과 같은 이 평화에 대한 빈번한 용예는 이 평화의 개념이 신약성경에서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를 반증한다. 하나님은 거듭 평화의 하나님으로, 예수님은 평화의 왕으로, 성령은 평화의 영으로 언급되고 있다. 부활하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평안하뇨"라고 인사했는데, 평화는 초대교회 성도들의 주된 인사말이었고, 이 인사말의 사용은 메시야적 평화를 이루시는 주님을 따르는 실천적 행위였다. 사도바울은 이방인이었던 고넬료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종합적으로 정리하여 말씀하면서 복음의 핵심을 "예수그리스도를 통한 화평(평화)의 복음"이라고 정리했다(행10:36). 바울은 에베소에 있는 신자들에게 화평의 복음으로 신을 신으라고 했다(엡6:15). 바울은 에베소 2장 이하에서 예수님께서 이 땅에 오시고 십자가에 죽으신 것은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화평케 하기 위함이라고 말하고,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 이 둘로 자기 안에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셨다"고 했다(엡2:14-15). 예수님과 그의 제자들이 평화를 말하고, 구원의 복음을 화평의 복음이라고 동일시 할 때 이들은 구약의 평화개념 곧 샬롬의 메시아적 적용을 의미했다.

평화라는 의미의 희브리어 '샬롬'( )은 흔히 전쟁의 없는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보다 광범위한 의미를 담고 있다. 샬롬은 전쟁이 없는 상태를 의미할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 속에서도 모든 갈등과 대립이 없는 평안과 기쁨을 의미한다. 그것은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복지와 안녕, 건강한 상태를 포함하며, 종교생활, 법질서와 사회적 관계, 국제관계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모든 것이 잘되고 풍요로운 행복한 상태를 의미한다. 샬롬은 복지를 의미하는 것이었고, 번영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기도 했다. "네 성 안에는 평강이 있고, 네 궁중에는 형통이 있을찌어다"(시122:7)가 바로 그런 의미었다. 따라서 샬롬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그리고 사람들과의 온전한 관계에서 오는 안녕(well-being)의 상태를 뜻한다. 그렇기 때문에 샬롬이라는 단어가 난공불락의 요세를 뜻하는 예루살렘(yer shalom)이 될 수 있었다. 구약 선지자들에 의하면 참된 평화는 하나님이 자기 백성과 세우신 언약 안에서 의와 공의가 이루어지고, 공동의 복지가 이루어지고, 모든 사람에 대한 평등과 경의가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미가선지자는 이스라엘과 맺으신 하나님의 언약은 "생명과 평화의 언약"이라고 말한다(미가2:5). 반면에 불의한 소득을 탐하고, 돈을 받고 재판하고, 모든 이들에게 공평이 없고, 사회적, 경제적 억압때문에 고통당한다면 거짓 선지자들이 평안하다 평안하다 하나 실상은 평화가 없다(렘6:13-14). 평화는 하나님과 바른 교제 속에서 이웃과도 바른 관계를 누리는 완전함이다. 그래서 평화, 곧 샬롬이란 단어는 아예 구원이라고 번역하는 것이 옳을 때가 많다.

신약에서 평화, 에이레네(?ιρ νη)는 구약의 샬롬처럼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는 않았다. '연합'이라는 어근에서 나온 이 말의 어의는 전쟁이 없고, 적대관계나 갈등이 해소됨으로서 이루어지는 질서와 조화의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즉 전쟁이나 분쟁의 반대개념(눅14:32, 행12:20)으로서 인간공동체 내의 화합(마19:34, 눅12:51, 고전7:15)으로 이해되기도 한다. 그래서 에이레네는 샬롬처럼 그 의미가 포괄적이지는 않지만 구약의 샬롬과 크게 다르지 않다. 히브리어 구약성경의 헬라어역인 70인역에서는 샬롬이 거의 에이레네로 번역되었다.
로마인들은 평화를 팍스(pax)라고 불렀다. 이 팍스라는 단어는 계약, 곧 서로 사우지 않겠다는 동의와 같은 어근에서 파생되었다. 그래서 팍스라는 단어는 '안전'(securitas), '평정'(tranquilitas), '쉼'(quies), '안식'(otium) 등과 연결될 수 있다고 베인톤은 지적한다. fhd마인에게도 평화(pax)는 단순한 전쟁의 없는 상태 그 이상의 어떤 것이었다.

고대사회에서 평화는 일종의 종교적 개념이었는데, 이것은 백성들의 끊임없는 원망(願望)이었던 것이다. 고대 헬라인들이나 로마인들은 평화를 인격화하거나 신격화하기도 했으나 희브리인들은 평화를 하나님의 선물로 이해했고(레26:6), 그 진정한 평화는 메시야의 내림에 서 보았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적 평화(Messianic shalom)다.

로마의 평화, 예수의 평화

우리는 인간의 역사 속에 오랜 전통으로 남아 있는 두 종류의 평화를 말할 수 있다. 첫째는 평화에 대한 로마적 개념인 '로마의 평화'(pax Romana)이며, 다른 하나는 예수그리스도가 주시는 진정한 평화, 곧 예수의 평화(pax Christi)이다. 로마의 평화는 제국의 군사적 우위에 기초한 정치적 평화이며, 잠제적 적을 폭력으로 제압함으로서 경쟁적 대상의 제거를 통해 이루어지는 비전(非戰)의 상태일 뿐이다. 물론 팍스 로마나는 아우구스투스 이전에도 존재했지만 특히 아우구스투스 시대에 엄청난 도약이 이루어졌다. 그는 내란을 종식시켰으며, 혼돈과 폭동이 사라졌고, 질서가 확립되었고, 예술과 상업, 농업이 발전했으며, 법의 구현되었다. 아우구스투스의 평화(pax Augusta)라는 이름이 여기서 유래되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로마의 평화, 곧 파스 로마나라는 개념이 생겼다. 이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사람은 다름 아닌 세네카(Seneca)였다. 세네카는 "전쟁영웅으로서의 황제를 "국가를 결속시키는 기반이며, 수많은 사람들이 호흡하는 삶의 숨"이라고 말하고, "그가 제국에서 떠난다면 수많은 사람들이 고난과 착취를 당할 수밖에 없으며, 왕이 살아 있을 때만 모든 것이 하나의 의미를 갖게 된다"고 했다. 말하자면 로마의 평화란 로마제국의 권력, 그리고 로마제국의 군사력과 분리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말하자면 로마의 평화란 피로 물든 평화였다.

팍스 로마나는 공평과 정의에 기초한 평화가 아니라, 제국의 힘이 공의요, 제국의 군사력이 선이었다. 이 로마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엄청난 폭력이 자행되었으며, 경쟁적인 나라들은 군사력으로 궤멸되었다. 군사력에 의해 쟁취되고 지켜지는 평화는 한시적인 평화일 뿐이다.팍스 로마나의 기간은 불과 2백여년에 불과했다. 로마의 평화를 진정한 평화로 간주할 수 있을까?

그러나 '예수의 평화'는 사랑과 자비에 기초한 진정한 평화다. 그는 평화의 왕으로 오셨고, 그의 십자가의 피로 말미암아 평화를 이룩했다(골1:20). 예수의 탄생과 삶과 가르침, 그리고 그의 십자가의 죽음과 부활은 우주적인 화해와 포괄적인 평화의 기초가 된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 없는 세계에는 진정한 평화가 있을 수 없다. 클라우스 벵스트(Klaus Wengst)가 그의「팍스 로마나」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초대 그리스도인들이 신앙과 선포의 중심으로서 평화에 대한 표상과 특별한 방법으로 결합되어 있다.

예수님이 태어났을 때 그를 죽이려는 헤롯의 음모나,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처형은 적어도 제국의 관점에서 볼 때는 팍스 로마나의 운동 속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예수의 탄생과 그의 활동은 로마의 통치자의 입장에서 볼 때 그것은 로마의 평화를 위협하는 반란이었다. 예수는 로마의 평화라는 이름으로 폭력의 희생자가 되었지만,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로서 폭력에 대응했다.

평화를 이루어가는 교회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시다(엡12:14ff).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이방인과 유대인의 담을 여시고 하나되게 하사 적대와 불신의 고리를 끊으사 화해케 하셨고, 분리되었던 집단들을 하나되게 하셨다. 그는 노예와 자유인, 남자와 여자, 야만인과 희랍인의 차이와 대립과 차별을 없이하셨다(갈3:28, 고전12:13, 골3:11). 그의 부활은 폭력과 전쟁사의 무자비한 연속에 반기를 드셨다. 로마의 평화란 이름으로 자행되었던 폭력의 희생자이신 예수님은 화해와 평화를 실현시켰다. 그는 십자가의 피로 평화를 실현시킨 것이다. 교회는 평화를 이루어가는 공동체여야 한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은 "한 몸으로 그리스도의 평화 속으로 부름 받은 자들이라"(골3:15)고 했다. 이것은 그리스도인들은 하나의 유기체, 곧 그리스도의 몸인 교회를 이루고 있다는 점과, 교회는 '예수의 평화'의 장(場)임을 난타낸다. 교회 공동체는 그리스도의 속죄사역을 통해 하나님과 화해되고, 하나님과 평화를 누리는 자들의 공동체이다. 이 평화는 인간관계속에서도 외연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 그는 우리의 평화이시다.

기독교와 폭력, 비폭력

게시자: hayoung an, 2009. 9. 21. 오후 11:41

CrossWalk 모임
2002년 10월 21일

정리 이재영 간사 (KAC)

"기독교인으로써 폭력을 어떻게 이해하고 대응하여야 하는가?"라는 참으로 어렵고도 중요한 문제에 기독교인은 늘 고민하여야 한다. 하지만, 우리는 언제부터인가 악이라고 규정된 세력을 제압하기 위한 소위 "정당한 무력사용"에는 관대해지게 되었다. 이제는 다른 종교나 집단에 대한 폭력의 사용이 교회 안에서도 특별한 논의 없이 당연히 받아들여지고 있다. 과연, 이러한 현실에 400년 이상 평화주의 전통을 지켜온 메노나이트를 비롯한 아나뱁티스트들의 신앙과 삶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고 있는가?

메노나이트(Mennonite)의 평화에 대한 이해

초기 재세례신앙운동을 시작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따른다는 것은 하나님과의 화해의 의미뿐만 아니라, 원수를 포함한 모든 인간과 화해하는 삶을 사는 것을 의미했다. 따라서, 16세기 종교개혁의 소용돌이 속에서 더 근본적 개혁을 요구했던 메노나이트는, 참혹한 박해와 첨예한 대립 속에서도 이러한 제자도적 삶의 모습을 포기하지 않았다. 이들은 교회(church)와 국가(state)권력의 분리를 주장했고, 폭력을 통한 자기방어를 반대하고, 군사적 힘에 의존하지 않는 무방어(defenselessness)을 강조하였다.

이러한 그들의 믿음과 신념은 20세기 양대 세계전쟁 속에서 양심에 의한 병역거부(conscientious objection)와 무저항(nonresistance)정신으로 이어지게 된다. 한편, 현대 메노나이트의 평화운동은 신앙적 자원의 기초가 되는 성경의 평화적 관점에서의 새로운 이해와 사회적 정의문제(justice issues)에 관한 관심을 높임으로써 평화활동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화해(reconciliation)가 예수 그리스도의 삶과 가르침의 중심이라는 신학적 이해에 기초하여, "화평케하는" 활동은 하나님의 자녀라고 선언하는 모든 이에게 확대되어야 할 소명이라고 강조되고 있다(마 5:9). 이러한 '부르심'에 부응하기 위해 1975년 생겨난 것이 메노나이트 화해 봉사부 (Mennonite Conciliation Service, 이하 MCS)이다.

MCS는 미국 메노나이트 중앙 위원회 (Mennonite Central Committee, 이하 MCC)의 평화담당 부서로 생겨났고, 갈등분쟁 대처와 예방에 관한 프로그램과 폭력과 파괴행위를 줄여나가기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MCS와 더불어, MCC의 범죄와 사법정의 (Crime and Justice)부서는 피해자와 가해자사이의 화해를 유도해내는, 특화된 중재의 형태인 피해자 가해자 화해 프로그램 (Victim Offender Reconciliation Program) 탄생에 기여 하기도 하였다.

기독교와 폭력사용

기독교적 관점에서 폭력을 연구하여 책을 쓴 프랑스의 법철학자이자 행동하는 기독교인인 자크 엘룰 (Jacques Ellul)은 그의 저서 "폭력 - 기독교적 반성과 희망"에서 오늘날 잘못되어 가고 있는 기독교인들의 폭력에 대한 이해에 대하여 경고의 메시지를 분명히 전달하고 있다. 그는 오늘날 그리스도인이 마땅히 해야 할 일은 "한편으로 폭력사용에 대한 모든 정당화를 공격하는 일이요, 다른 한편으로 폭력사용의 기독교적 정당화를 제공하는 것을 거절하는 것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통찰 속에는 절대 폭력을 정당화 해주지 않기 떄문이다.

교회의 의무는 폭력을 정당화하는 억압자를 폭력으로 대항하거나, 선택에 여지가 없어 폭력을 사용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하는 억눌린 자에게 복종하고 참의하고 권고하는 것이 아니다. 크리스천은 억압자와 억눌린 자 사이의 중재자로써 봉사해야 한다. 억눌린 자를 위해 하나님께로 기름부음 받은 대변인이다. 신에 의해 망각된 자들의 중보자이다. 그것이 바로 아브라함이 소돔을 위해 행한 역할이다.

폭력이 발생했다고 하면 크리스천은 항상 비난을 받지 않으면 않된다. 왜냐하면, 폭력이 발생했다는 것은 항상 크리스천들이 가난한 자들, 눌린 자들에게 관심을 두지 않았기 때문에, 권력을 가진 자들에게 가난한 자들의 이유를 변호해 주지 아니하고, 정의를 위하여 끊임없이 싸우지 아니한 때문이다.

흥미롭게도 "폭력과 비폭력 - 기독교 윤리학 연구시리즈"을 쓴 맹용길 교수는 인류 역사속에 몇 안 되는 비폭력적 저항의 성공의 예, 특히 Martin Luther King Jr.의 경우를 분석하여 예수 그리스도의 평화를 형성하는 방법이 시대에 잘못된 제도나 관습, 문화에 대한 비폭력적 저항이었음을 제시한다.

비폭력적 저항

비폭력적 저항(Nonviolent Resistance)은 저항하는 방법으로서 삶의 문제에 대하여 수동적으로 쳐다보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용기와 인내를 가지고 악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며 저항하는 방법이다. Martin Luther King Jr.는 비폭력 저항을 기독교적 관점에서 해석하고 있다. 그는 비폭력 저항을 사회변화(social change)를 일으키는 입장에서 제3의 길로서 제시하고 있다. 따라서, King에게 있어 비폭력은 삶의 방법(way of life)이 되는 것이고, 기독교적 삶의 방법인 것이다.

예) King의 비폭력 저항의 성격

1) 비폭력적 저항은 회피나 수동적 방법이 아니고, 악에 대하여 항거하고 저항하는 능동적 방법이다. 따라서, 비폭력적 저항은 물리적으로 수동적이며 영적으로 강력하게 능동적이다.

2) 비폭력적 저항은 악행자를 이기려고 하거나 부끄럽게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친구가 되고자 하고 그 악행자로 하여금 이해를 얻고자 하는 것이다. 따라서, 비협동(non-cooperation)이나 boycott이 방법이 되지만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님을 알아야 한다.

3) 저항은 하되 결코 그 악의 세력에 직접적인 공격이 아닌, 부정의 한 의식이나 문화를 바꾸는데 초점을 맞춘다. King은 흑백의 갈등보다 정의와 불의에 더 초점을 두었다.

4) 비폭력 저항의 방법은 복수가 아닌 고난(suffering)을 기꺼이 받아 들이는 것이다. 정의와 자유를 위해 피를 흘려야 한다면 흘릴 수 밖에 없는 것을 의미한다.

5) 비폭력은 물리적 폭력뿐 아니라 내적이고 영적인 폭력도 피하는 것이다. 비폭력은 사랑으로 만들어진 무기이다.

6) 비폭력적 저항의 저변에는 우주가 정의의 편에 있다는, 진리는 반드시 승리한다는 확신이 있다. 이는 낭만적이고 비현실적이라는 비판도 받지만 비폭력 저항이 힘들고 많은 훈련이 필요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King의 방법은 1)경험적 대안 2)기독교적 사랑 3)그리스도의 정신과 간디의 방법에 영향을 받음. 흑백분리(segregation)에 대항하여 부당한 체제와 전통의 전복이 아니라 통합(integration)을 목적으로 했다.

9.11테러 그 후: 초강대국 국민의 자격과 책임

게시자: hayoung an, 2009. 9. 21. 오후 11:39

2001년 10월
이재영

"이렇게 폭력적으로 보복을 한다면 나중에 우리의 아이들에게 어떻게 평화적인 관계형성에 대해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테러리스트들이 미국의 무역센터를 공격하고 며칠 후에 The Town Meeting이라는 한 TV 프로그램에서 중년의 부인이 나와 이렇게 질문조로 이야기했다. "우리가 이제 보복을 결의한다면 다음세대에서 과연 화해가 가능하게 될까요?" 그러나, 곧 그녀의 목소리는 보복을 외치는 소리에 묻혀 완전히 무시되고 말았다.

테러의 여파로 귀국 행 비행기가 취소되었기 때문에 실망스럽게도 시애틀에 발이 묶여 있던 나는 TV를 보면서 왜 이렇게 미국인들이 분노하고 열분을 토하고 있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그 프로그램에 나온 사람들이 누가 테러를 했는지, 어떻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이 범인들에게 어떤 처분이 내려져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굉장히 관심이 있었지만,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에 대해서는 별로 관심들이 없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비록 일부는 이성을 지키려고 노력했지만, 그들의 논지는 약했고 요점에서 벗어나는 것이었다. 심지어 한 고등학생이 화가 나서 "왜 다른 나라 사람들이 미국을 이토록 싫어하는지 도저히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나라가 이룬 성과 때문인가요? 우리 경제, 기술 그리고 지금껏 일구어 세운 위대한 국가 때문에 이런 일을 당하는 게 마땅한 건가요?" 그 청년의 말을 들으면서 나는 이것이 국민 대다수나 미국의 양심에서 나오는 전형적인 반응이라고 믿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기들의 극심한 분노 때문에 이번 재난의 원인을 제대로 보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한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이제, 미국은 또 한번의 성전(聖戰)을 시작했다. 미국 정부는 아프카니스탄에 대한 이 보복 전쟁이 사람들을 향한 것이 아니라 테러리스트들을 향한 것이라고들 말한다. 미공군은 폭탄과 식량을 동시에 떨어뜨리며, 정치 지도자들은 폭탄 맞을 어린이들을 위한 자금 조달 모금운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지금 다시 한번 씁쓸한 역사적 아이러니를 목도하고 있는 것이다! 자신들이 공격하고 있는 나라의 국민들의 피를 흘리지 않는 전쟁이 어떻게 가능하단 말인가? 미국은 지금 테러리스트들이 했던 일과 똑같은 일을 하고 있는 것이다.

테러리스트들은 정부와 정책을 공격하는 수단으로서 수천명의 무고한 국민들을 희생시켰다. 그리고 그것은 분명히 미국 정부만을 향한 공격일 뿐 아니라 미국의 국민들을 향한 공격이기도 했다. 겉으로 아프가니스탄을 공격하는 명분은 다름아닌 아프가니스탄 국민들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제는 계획적인 폭력의 사용을 정당화하려는 어떠한 시도도 그쳐야 한다. 그것이 테러리스트이든지, 정의를 좇는 사람이든지 간에 말이다. 인류 역사를 통해 우리는 폭력을 사용하여 평화로운 결말이 얻을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평화로운 결과를 얻고자 한다면 평화로운 과정이 필요하다.

비록 국민이 주인 되는 민주주의 사회에서도 최종 결정권은 최고 지도자에게 속한다. 하지만, 국민들은 바로 그 최고 지도자를 있게 만든 장본인이다. 따라서, 이처럼 어려운 시기에 미국의 대중은 더욱 이성적이어야 한다. 미국인들은 9.11이후로 자국의 지도자들에게 무제한적인 권한을 부여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그것은 엄청난 위험의 잠재력을 갖는 것이다. 지금 그 지도자는 사람들이 지겨워 하더라도 이 전쟁은 계속 수행될 것이라고 공공연히 말하고 있다.

인류는 과거로부터 교훈을 얻어야 한다. 민족주의가 반드시 맹목적인 복종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과 대중매체는 대중들의 합리적인 눈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현실은 그렇지 않고 있다.

발달된 첨단무기기술과 넘치는 정보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감각을 무디게 만들어 왔다. 정보와 멀티미디어 세대에게 화면에 보이는 끔찍한 장면은 실제이더라도 비현실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지기 쉽다. 미국 사람들은 자국의 젊은 군인들이 폭탄으로서 다른 나라와 생존 전쟁을 하면서 건물과 도로를 파괴할 때, 한가로이 야구 챔피언 시리즈를 보면서 자기가 가장 좋아하는 선수들의 경기에 흥분하기도 하고 실망하기도 한다. 무엇을 바라보고 있느냐가 우리가 누구인지를 결정한다. 지금 미국인들이 세계에 보여주고 있는 것이 과연 도덕적인 일인가? 지도자들에게는 높은 도덕적 책임과 보편적 복지에 대한 민감성이 요구된다. 마찬가지로, 세계는 세계를 이끄는 자랑스러운 국민이라고 자부하는 미국인들이 세계를 이끄는 나라의 국민들로서의 그 만한 자격을 갖추기를 기대한다.

세계 초강대국으로서의 미국의 대외 정책은 때때로 수 만 마일 밖에 있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이는 미국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사실이다. 결국, 세계 초강대국의 국민들의 책임은 그들 자신의 안전과 세계 평화를 위해 매우 중요하다. 특히, 그 가운데 평화 사역자들의 역할은 아주 결정적이다. 평화 사역자들은 이렇게 세계가 불확실하고 불투명한 가운데 있을 때 균형 잡힌 대중여론과 비판적 사고 패턴을 조성할 책임이 있다. 외면과 무관심은 또 다른 수천의 생명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을 권력 오용의 여지를 만들어준다. 브라질의 교육가Paulo Freire가 우리에게 경고한 것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억압은 억압을 받는 피해자만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가해자도 억압하는 결과를 낳는다."
분명히 테러리즘은 중단되어야 한다. 그리고 또한 모두가 동의하는 바와 같이, 9.11 테러행위에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정의 앞으로 불려져야 한다. 그러나 우리 모두가 알 듯이 문제의 근원이 존속하는 한 그들을 찾고 처벌하는 것이 폭력적 테러 공격의 끝은 아닐 것이다. 즉, 미국의 대외 외교정책이 세계 평화 건설의 노력을 해치고 있지는 않은지 재검토해야 될 필요가 있다.

한 나라의 대외 외교정책은 자국의 국민들의 이익을 최우선시 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하다. 따라서, 미국 대중들은 다른 나라를 억압하는 미국의 대외 외교정책이 부메랑이 되어 자신들을 해 입히기 전에 자기 정부에 변화를 요구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미국이 당장 발등의 불은 끌 수 있을지 몰라도 결코 살아있는 불씨를 없앨 수는 없다. 결국 문제해결의 열쇠는 미국 대중의 손에 달려 있는 것이다.

* 이 글은 Eastern Mennonite Univ.의 갈등분쟁 변환학 대학원 잡지에 실린 글입니다.

구약 성경에 기록된 많은 전쟁을 어떻게 이해 할것인가?

게시자: hayoung an, 2009. 9. 21. 오후 11:38   [ KAC Admin에 의해 업데이트됨(2010. 6. 15. 오전 1:48) ]

구약성경의 전쟁이야기에 대한 성경적 평화주의적 견해

Mennonite Central Committee, By Linda Gehman Peachey

우리는 예수님에 대해 생각할 때 흔히 동산에서 기도하시거나 양 때를 인도하는 또는 어린 아이들을 축복해 주시는 장면 등을 연상하곤 한다.

예수님이 칼을 들거나 기마 전차를 탄 모습은 성경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실제로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예수께서 원수를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 대한 사랑의 삶을 사신 것을 받아들인다. 또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드러내기 위해 폭력 사용을 허락하지 않으셨다는 사실에도 동의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을 향한 예수의 가르침이 과연 폭력사용과 전쟁 참여를 거부하는 것 까지로 해석해야 한다는 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이와 관련하여 가장 많이 묻는 질문은 "구약 성경에서의 전쟁 이야기를 과연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람들로 하여금 전쟁을 일으키게 하고 서로를 죽이게 한 사건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는가? 하나님께서는 선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 이따금씩 폭력과 전쟁을 허용하신다는 말이 아닌가? 이에 대한 답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그러나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이 확신하는 중요한 관점들을 알아보는 것은 도움이 된다.

구약성경에는 실제로 전쟁 역사가 상당부분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모든 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관심과 평화를 향한 메시지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실제로 성경은 인간을 포함한 지구상의 모든 피조물에 대한 창조 이야기로 시작된다. 다른 나라를 강제로 통치했던 제국주의의 극치를 이룬 바빌론이나 이집트 시대 이야기와는 직접적이고도 근본적인 대조를 이룬다. 창세기는 인간이 다른 인간을 지배하는 방식으로서가 아닌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통치에 우리가 어떻게 협력해야 하는지를 잘 설명하고 있다. 이스라엘 역사의 초대 영웅들은 폭력을 사용했던 왕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타국에서 언제라도 위험에 처할 수 있었던 하나님의 부름에 순종했던 평범한 남자와 여자들이었다. 그들은 자신들의 땅이나 안전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신뢰했으며 이 따금씩 갈등이 생길 때면 비폭력적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하고자 한 사람들이었다.

예를 들어 아브라함(Abraham)과 조카 롯(Lot)이 기르던 가축들이 증가하자 같은 땅에서 공존하는 것이 어렵게 되었을 때 두 사람은 평화적인 방법으로 서로로부터 떨어지고자 했다. 이삭(Isaac)이 블레셋 사람들(Philistines) 과 함께 살면서 불어나는 가축 때와 식수 때문에 갈등이 생겼을 때 이삭은 타 지역으로의 이동을 택했고 그 곳에서 새로운 우물을 팠다. 하나님께서는 그로 인해 이삭에게 복을 주셨고 두려워하지 말라는 확신의 말씀을 주셨다. 또한 야곱(Jacob)이 하란에서 가나안으로 돌아가서 형 에서(Esau)를 만났을 때에도 힘의 우월을 과시하기 보다는 겸손하고도 회개하는 마음으로 형에게 나아갔다. 야곱 자신이 형 에서(Esau) 에게 복종함으로써 이스라엘은 그 땅을 얻을 수 있었고 평화롭게 살 수 있었다.

밀라드 린드 (Millard Lind)의 책 "하나님은 용사이다! (Yahweh is a warrior)"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것은 이러한 성경 이야기가 모두 이스라엘의 군사력이 최고조에 달했던 다윗 왕의 통치시절에 기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브라함과 롯의 이야기는 롯의 후손들인 모압 사람들 을 죽인 제국을 대한 평화적 갈등해결의 중요성을 일깨워 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삭과 블레셋 사람들과의 갈등이나, 야곱(Jacob)과 형 에서(Esau) 의 관계 역시 다윗이 블레셋과 에돔 사람들(에서의 후손)과 벌였던 많은 전쟁의 교훈에 대해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이러한 구약성경의 이야기들은 사람들이 이웃과의 관계를 폭력이 아닌 평화적인 방법으로 해결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에 더욱 일치하는 효과적이고도 진실된 방법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구약성경의 룻기(Ruth)와 요나서(Jonah)에는 모든 사람들을 향한 하나님의 전 우주적인 관심이 한층 더 강조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룻기 이야기는 모압 사람들과 같이 멸시 받는 이방인들도 여호와를 진정으로 경배했을 때 다윗 왕의 계보에 들어 갈 수 있는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요나 이야기 또한 증오했던 아시리아의 압제자들도 회개하고 하나님의 자비를 받을 수 있었다는 것,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좌우(左右)도 제대로 구분 못하는 니느웨의 아이들까지도 돌보셨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마지막으로 구약 성경의 이사야 2장과 미가서 4장에는 모든 나라들이 주의 장막으로 흐르고 하나님의 지시와 심판을 듣는다는 참으로 놀라운 소식이 기록되어 있다. "그가 많은 민족 중에 심판하시며 먼 곳 강한 이방을 판결 하시리니 무리가 그 칼을 쳐서 보습을 만들고 창을 쳐서 낫을 만들 것 이며 이 나라와 저 나라가 다시는 칼을 들고 서로 치지 아니하며 다시는 전쟁을 연습하지 아니하고…" 물론 이러한 안녕(well-being)에 대한 강조는 구약 성경 전반에 걸쳐 히브리어 단어인 "샬롬(Shalom)"으로 표현된다. 이스라엘의 소망은 샬롬이라는 "peace(평화)"보다 훨씬 더 풍부하고 넓은 개념의 안녕(well-being), 완전함(a sense of wholeness), 만족(contentment), 안전(safety)을 구하는 단어이다. 그러나 우리가 구약성경에서 말하는 거룩한 전쟁(holy war)에 대해서 어떻게 이해해야 할 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견이 분분하다. 과연 지금까지 언급한 평화 주제와는 어떠한 관련이 있고 또 일치하는가? 이 문제와 관련하여 밀라드 린드의 해석이 또 다시 우리에게 도움을 준다. 린드는 과거 이스라엘의 전통적 전쟁이 주는 의미는 왕의 통치와 군사력 개발 유지에 의존하는 경향을 비판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와 같은 사실은 이스라엘의 왕권과 군사력을 당시의 주위 나라들과 비교하여 본다면 아주 분명히 알 수 있다.

이스라엘 주변 나라들은 모든 문화, 종교, 경제 제도가 도시 국가를 통치하는 왕권 중심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사람들은 왕이 신으로부터 폭력사용을 허락 받았다는 것을 믿었으며 왕은 또한 이것을 항상 전술적인 군대를 통하여 실천하곤 했다. 이 땅에서의 왕은 신을 대신하였기 때문에 사람들은 전쟁에서 왕의 명령에 충성을 맹세했고 기꺼이 몸을 바쳐 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핵심 지도자는 백성들의 통치자로서가 아닌 하나님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법을 전해 준 모세와 같은 선지자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왕의 전쟁에 참여하여 싸우기 보다는 하나님의 법을 순종함으로 하나님께 충성을 다해야 했던 것이다. 더욱이 국가의 안전은 군대를 양성하거나 다른 나라의 군대와 연합함으로써 얻어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말씀과 개입(介入)을 바람으로써 자신들의 안전을 기대해야만 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께서 과거에 자기 백성을 출애굽 시켰던 것처럼 자신들을 압제하는 사람들로부터 구해내실 것이라는 기대하는 믿음을 가져야만 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싸워야 했을 때는 전문적인 군대로서가 아닌 모세, 드보라, 기드온 사무엘 등과 같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이 인도하는 자발적이고도 일시적으로 모인 지원자들에 의해 수행되었다. 이러한 방법으로 이스라엘은 종종 적을 패배시키는 하나님의 기적과도 같은 도움을 경험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스라엘에서는 (왕권이 부여된 초기에) 정치, 경제, 군사적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해 격렬한 저항이 했었다. 왜냐하면 야훼만이 그들의 왕이고 인도자이시기 때문이다. 또한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통치와 보호 아래 하나의 공동체를 이루며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요구한 왕의 통치가 받아들여진다 하더라도 하나님을 향한 이스라엘 백성의 충성과 순종이 변치 않고 또한 선지자들이 제시한 하나님의 규율이 지켜지기 위해 사람들은 새로운 모델의 변형된 왕정(王政)이 실현되기를 기대하였다. 예를 들면 신명기 17장에는 왕이 통치할 때 스스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하는지에 대한 분명한 지침이 나타나 있다. 우선 왕은 공동체 생활을 순종하고 공동체 내에서 선택된 사람이어야 했으며 그렇게 선택 받은 사람으로서의 자질은 정직해야 하며, 돈을 빌려주고 이자를 취하면 안되고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기꺼이 도움을 줄 수 있는 사람들이어야 했다.

그 밖에도 왕실 군대나 경제력을 이용한 전형적인 물건 획득 행위를 비판하는 명령도 나타나 있다. 왕은 또한 말이나 전문 군대를 획득하면 안 되었다. 자기 백성을 다른 군대와 바꾸는 조건으로 노예로 팔아 넘기는 것도 금지되어 있었다. 셋째로 왕은 하나님으로부터 마음이 돌아서지 않도록 자신을 위해 많은 아내를 거느리거나 그러한 결혼을 용인하기 위한 외국 군대와의 연합에 의존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마지막으로 왕은 스스로를 위한 부를 축적해서도 안 되었다.

네가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이르러서 그 땅을 얻어 거할 때에 만일 우리도 우리 주위의 열국 같이 우리 위에 왕을 세우리라는 뜻이 나거든 15반드시 네 하나님 여호와의 택하신 자를 네 위에 왕으로 세울 것이면 네 위에 왕을 세우려면 네 형제 중에서 한 사람으로 할 것이요 네 형제 아닌 타국인을 네 위에 세우지 말 것이며16 왕 된 자는 말을 많이 두지 말 것이요 말을 많이 얻으려고 그 백성을 애굽으로 돌아가게 말 것이니 이는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시기를 너희가 이 후에는 그 길로 다시 돌아가지 말 것이라 하셨음이며 17 아내를 많이 두어서 그 마음이 미혹되지 말 것이며 은 금을 자기를 위하여 많이 쌓지 말 것이니라 (신 17:14-17)

밀라드 린드가 말했던 것처럼 "가나안 땅의 왕들에게는 자신을 섬기고 싸움터에서도 충실했던 자신들의 종에게 보상 할 수 있도록 흔히들 부와 재산을 축적하는 관습이 있었다" 그러나 이스라엘 왕은 이러한 지침에 따라 행동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선지자들은 왕이 상비군을 개발 유지하며 외국군대와의 연합에 의지하는 것에 대하여 아주 가혹하게 꾸짖었다. 그러므로 비록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으로 하여금 싸우게 하신 일도 있었지만 그들의 군대에 의존하는 것에 대한 계속되는 비판도 있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것은 특별히 주위의 다른 나라들과 비교되는 이스라엘의 신학과 실천의 증거이다.

오늘날의 세계에서는 이러한 전쟁 역사를 쉽게 읽고 또 현대에 있어서도 전쟁에 참여하는 것은 합법적이라고 생각하는 의견이 지배적인 것 같다. 그러나 역사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사람들은 이웃 나라들의 전통군대와 그들의 지혜를 본받기 보다는 먼저 하나님을 의지해야 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기독교 평화주의자의 두 번째 관점은 성경은 처음부터 끝가지 같은 방식으로 읽고 또 이해할 수 있는 그러한 평범한 책이 아니다는 것이다. 오히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다양한 이해와 말씀 전체를 읽는 동안 생각의 발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대부분의 그리스도 인들은 성경자료의 많은 부분들, 예를 들면 구약에서의 식생활 습관과 철저한 규약; 부모를 저주하거나 간음 또는 사람을 죽인 위험한 소를 계속 살려 두는 것 등에 대해 죽어 마땅하다고 하는 모세의 율법 등에 관해서는 이러한 관점에 대해서는 타당하다고도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과 초대교회에서도 구약에서 실천된 몇몇 사례들, 일부다처제, 안식일에 대한 지나친 율법적 준수 등은 거부되었다. 예수께서는 특별히 산상수훈 (마태복음 5장)을 통하여 살인, 간음, 이혼, 맹세, 원수에게 복수하는 것 등에 대한 율법의 가르침을 깊이 이해하여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예수님은 말씀하신대로 율법을 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인간사회를 위한 진정한 목적을 새롭게 확립하고 완성시키기 위해 오셨다.

예수님께는 비록 전쟁 불참에 대한 분명한 언급은 하지 않았지만 당신의 제자들로 하여금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 있어 서로 사랑하고 존중하는 관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을 분명히 말씀하셨다. 이것은 비단 가까운 친구만이 아닌 당시의 여자들처럼 사회적으로 낮은 계층에 있는 사람들까지도 포함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또한 부유한 유대인이나 종종 자신들을 압제하고 핍박했던 로마의 이방인들까지도 포함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리스도께서 말씀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무엇을 하든지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도 하나님의 자녀로서 하나님께서 하시는 것처럼 행동해야만 한다. 하나님께서 햇빛과 비를 모든 사람들에게 내리는 것처럼 우리 또한 모든 사람들을 사랑하고 사회의 구석 구석에 있는 소외된 사람들, 심지어 원수까지도 사랑해야만 한다.

초대교회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을 폭력을 사용해서는 안 된다는 것으로 이해하였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처음 3세기 동안 군대에서 복무를 하거나 군대의 축하행사에 참여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순교자의 거울에 (The Martyrs' Mirror) 의하면 그리스도인은 3세기 초기에 군대의 승리를 자축하는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고 해서 많은 핍박을 받았고 이것은 제국을 경멸하는 행위로 간주되어 고소 당했었다. 그 당시 Marinus, Maximilian, Marcellus 같은 사람들은 군복무 참여를 거부하였기에 처형된 그리스도인들이었다. 심지어 콘스탄틴이 황제가 된 이후인 4세기에도 Martin of Tours 는 말하기를 "나는 그리스도의 군사입니다. 그러므로 전쟁에서 싸움은 합당치 않습니다"라고 선언하였다. Martin 은 겁쟁이로 고소 당했고 적과의 전투시 최전방에 아무런 무장 없이 서게 되었다. 그러나 적군(야만족들)은 다음 날 싸우지 않고 항복하였기 때문에 그는 생명을 건질 수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해내려 오고 있다.

이러한 태도는 초대교회의 순교자들 Tertullian, Origin, Justine 이 작성한 고백문 들을 통해 일관성 있게 들어 났다. AD 200 년 경에 기록된 사도들의 전통(Apostolic Tradition)에 의하면 (그리스도인의) 살인을 엄격히 금했으며 이를 위해 명령 받은 군인이나 집정관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자 한다면 살인 명령을 거부하든지 아니면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포기하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누구든지 그리스도인으로서 군인이 되고자 한다면 차라리 교회를 떠나는 것이 낫다고 충고했다. "왜냐하면 그러한 행동은 하나님을 경멸하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성경적 평화주의자들이 더욱 확신하는 것은 예수님을 통해서만 성경 전체에 대한 해석이 온전해 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이해되지 않는 몇몇 문제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가장 잘 드러내신 예수님을 통해서 바라보아야 한다.

이러한 믿음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 예수의 가르침과 삶을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함을 의미한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누구시며 완전한 인간이 된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지에 관해 모범을 보이신 분이시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이 누구이시며 과연 우리들로부터 무엇을 원하시는 가에 알기 위해 예수께서 보여주신 실례와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

이러한 확신은 또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입장을 확실히 받아들이게 한다. 만일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통해 나타나셨다면 스스로가 하나님의 뜻을 받드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던 당시 종교 지도자들이 취한 행동은 그야말로 끔찍한 잘못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폭력을 사용하여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죽였기 때문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위를 외치면서도 하나님의 사랑의 능력에 진실되게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자리에 앉아 사람들을 지배하려고 했던 사람들을 오히려 부끄럽게 하였다.
십자가는 예수께서 하나님을 영원히 신뢰했고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신 하나님의 능력을 믿고 선택했다는 것을 보여준 사건이었다. 이러한 십자가와 부활의 방법으로 하나님은 악의 세력을 끊으셨다. 사탄은 가장 처참한 일을 저질렀지만 최후의 승자는 되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은 죄와 사망보다도 훨씬 더 강력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폭력이 아닌 "사랑"을 주장할 수 있고 그리스도만이 하늘과 땅의 주인 되심을 고백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구약에 나타난 전쟁역사에 대한 질문은 그 자체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기독교 평화주의자들은 몇 가지 사실에 대한 확신을 갖고 있다. 우선 구약 성경 자체도 군사력에 의존하는 사람들에 대한 강한 비판을 하고 있으며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사랑과 보호 아래 살아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둘째는 구약 성경에서의 실천되었던 부분들을 재해석하는 운동이 예수님과 초대 교회 안에서도 일어났다는 점이다. 셋째로 예수님은 하나님과 전인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을 가장 완벽히 드러나신 분이라는 점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삶과 죽음 그리고 부활은 우리가 성경의 모든 나머지 부분들을 이해할 수 있게 도와 주는 렌즈 역할을 한다고 할 수 있다.

‹ 이전    1-10/17    다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