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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적 배경

16세기 종교개혁과 아나뱁티스트 운동의 배경

마틴 루터(1483-1546)는  인간의 무력감 무능함을 뼈저리게 체험한 후 인간의 선행에 의한 구원의 가능성을 부인하였고 믿음에 의한 칭의의 교리를 주장했다. 루터는 1517년 10월 31일 면죄부(免罪符) 판매에 항의하여 비텐베르크성(城) 교회 정문에 붙인 95개조의 의견서를 붙임으로써 가톨릭교회에 대항하여 교회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 올렸다. 루터는 당시 교회의 영적인 타락과 물질적 부패의 온상이 되어온 면죄부제도를 비롯하여 가톨릭의 일곱 가지 성례전 (결혼, 성직임명, 종부성사, 견신례, 고행, 미사, 세례)을 부인하고 그 중에서 세례와 주의 만찬(미사로부터 대체)만을 인정하였다.  루터는 교황의 무오성을 부인했고, 오히려 만인 제사장설(종교개혁의 제2원칙)을 주장했다. 

독일에는 마틴루터가 있었다면 스위스에는 쯔빙글리가 있었다. 그는 스위스 쮜리히에서 가장 영향력있는 개혁자였다.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움 없이 설파했고, 구교회의 악습을 비판했으며 교회개혁을 이루는 핵심적인 사안들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교회내의 성상들을 제거했고 라틴어 미사대신 독일 교회의 예배를 도입했으며 수도자(수녀)들과 성직자들의 결혼하는 것을 지지했고 자신도 결혼했다. 그는 스위스 의회로부터 모든 개혁 사항들에 대한 지지를 받았다. 그러나 교회 개혁의 속도가 너무 빨라져서 국가의 입장과 사회적 흐름을 너무 앞서가는 것을 경계했다.

쯔빙글리를 잘 아는 친구들은 이 부분에 있어서는 생각이 달랐다. 콘라드 그레벨, 펠릭스 만쯔와 같은 사람들은 교회 개혁의 속도가 하나님의 말씀의 분명한 가르침이 담겨져 있는 성경에 따른다면 결코 빠르지 않았고 여겼다. 오히려 쯔빙글리가 지나치게 스위스 시의회의 입장만을 대변한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교회와 믿음에 관한 모든 문제가 있을 때마다 (my lord, my lord 하면서) 쯔빙글리에게 달려가서 그의 의견만을  묻는 것에 대해 비판했다. 믿는 신자들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의지하고 성경을 통해서 조언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아나뱁티스트 운동은 쯔빙글리의 급진적인 제자들이었던 바로 이 스위스 형제단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스위스의 쯔빙글리는 개혁에 있어서 국민들이 지나치게 앞서감으로 인해 국가 정책의 반대 입장에 서서 사회적인 물의를 일으키기를 원치 않았다는 점에서는 독일의 루터와 공통된 생각이었다.

프로테스탄트(Protestant) 운동의 분류

종교개혁 당시 카톨릭 교회로부터 갈라진 사람들은 루터 교회(Lutheran)와 연합하기도 했지만 또 다른 개혁파 교회들과도 연합했다. 당시 거의 모든 교회들이 카톨릭 교회로부터의 분리를 선언했고, 카톨릭 교회는 이에 대해 더 이상의 이탈은 하지 말 것을 명령한다(1529). 그러나 개혁 교회들의 저항(protest)은 계속되었고 그들에겐 프로테스탄트(Protestant:저항자)라는 새로운 이름이 붙여지기 시작했다. 

1. 루터란(독일의 비텐베르그를 중심으로)
2. 개혁 교회(Reformed church)
① 개혁교회(스위스의 독일어 사용 지역 중심)
② 아나뱁티스트(스위스 쯔리히)
③ 장로교 (스위스의 프랑스어 사용 지역중심)


아나뱁티스트(재세례신앙) 운동의 유래

재세례신앙운동은 1525년 스위스의 개혁자 츠빙글리의 제자들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들은 대중을 위한 국가교회에 대해서만 알고 있었던 츠빙글리의 개혁 방법과는 달리 교회 개혁을 완전히 새롭게 시도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국가의 강요나 법에 지배받지 않는 신자들로 구성된 교회를 원했다. 이것이 바로 16세기 아나뱁티스트-재세례신앙운동이 처음 추구했던 목표였다. 그렇기 때문에 누구나가 유아세례를 통해 자동으로 교회 멤버십을 갖고 살아갔던 국가교회의 요구와는 달리 믿음과 행함이 일치하는 하나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며 참 그리스도인이 되기를 열망하는 사람들의 교제를 추구하였다. 세례는 다시 돌이킬 수 없는 주님과의 새로운 언약을 수락한 신자들의 내적인 믿음과 헌신에 대한 외적인 표시로서 보았다. 

이들은 당시의 종교 개혁자들이 국가교회 체제 하에서 온건한 태도를 취하는 것을 비판했으며 그리스도인의 신앙은 예수님을 믿는 것 뿐 아니라 그 분의 가르침을 따르는 철저한 제자도에서 시작한다고 믿었다. 세례는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고 하나님의 은총의 언약과 그리스도와의 진정한 연합의 의미가 있으므로 유아에게 베풀 것이 아니라 분별력 있는 나이에 도달한 사람을 위해 보류되어야 하며 신자들의 개인적인 신앙 고백에 근거해서 베풀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16세기 당시 세례는 시민권과 결부된 중요한 항목이었다. 세례를 받지 않은 유아는 국가교회 체제하에서 주민 등록을 할 수가 없었고, 따라서 세금을 징수 할 수 있는 명목을 마련해주지 않는 행위였기 때문에 국가의 입장에서 재세례신자들의 행위는 국가의 법을 어기는 일에 해당하였다. 결국 츠빙글리의 제자들은 교회개혁의 방향과 속도가  국가의 견해와는 관계없이 성령의 인도를 받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를 중심으로 주도적으로 이루어져야 된다고 주장했고 마침내 1525년 1월 21일 스위스 형제단은 츠빙글리를 중심으로 한 국가교회와의 완전한 결별을 선언하게 된다.

그들의 이러한 급진적인 주장에 대해 당시의 국가교회로서는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반역이요 이단종파로서 처벌 받아야 마땅하다고 간주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이 주장한 철저한 제자도와 사랑의 윤리(평화), 공동체의 비전은 무시되었고 오히려 카톨릭과 개신교 모두로부터 정죄받아 신앙과 양심의 자유는 철저히 무시당한채 새로운 곳으로 이주에 이주를 거듭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으로까지 내몰리게 되었습니다. 아나뱁티스트라는 말은 "재세례를 주는 놈들(rebaptiser)" 이라는 경멸조의 별명이었으며 16세기 당시에는 로마 카톨릭, 루터파, 캘빈파에 속하지 않았던 거의 모든 사람들을 지칭하는 말이 되기까지 했다.

아나뱁티스트를 이단으로 몰고 간 결정적 사건들


16세기 재세례신앙운동에 대한 오해 중 하나는 이들을 토마스 뮨쩌를 중심으로 폭력적이고 광적인 신자들의 행위와 동일시하는 견해다. 헤럴드 벤더를 중심으로 한 학자들은 뮨쩌와 같이 무력사용을 정당화한 행위는 그리스도의 비폭력과 사랑의 윤리를 추구했던 당시의 평화로운 재세례신자들과는 본질적으로 다른 아나뱁티스트-재세례신앙운동의 정통성에 전혀 못 미치는 비극적인 사건으로 간주하였다. 오직 성경의 권위를 인정하고, 공동체를 통한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르며,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생활 속에서 철저히 실천하고자 시작된 아나뱁티스트 신자들은 오늘날 전 세계적으로 160만명 정도가 있으며 한국 교회에는 메노나이트, 후터라이트, 아미쉬, 브래드런 교회 등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신약교회를 회복하기 위해 시작된 재세례신앙운동은 당시의 카톨릭과 개혁교회들로부터 모진 박해와 핍박을 받기 시작했으며 16세기 이후 특정한 기독교 그룹에서 4천명 이상의 순교자들이 배출된 인류 역사의 믿음의 선한 싸움 중에서 가장 의미심장했던 사건으로 평가받고 있다. 



아나뱁티스트 교회의 특징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신자들의 교회”(Believers’Church)라고 불리었으며 카톨릭 교회뿐 아니라 루터(Luther)와 칼빈 (Calvin)의 영향을 받은 종교개혁운동과도 구분되었습니다. 이들의 독특한 강조점때문에 재세례 신앙은 여러 가지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근본적 개혁교회(Church of the Radical Reformation)”라고 불리게 된 것은 그들이 진정한 교회, 즉 믿음의 뿌리로(the root of faith) 돌아가야 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기독교의 뿌리를 반드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찾아야 한다고 믿었고 성경을 이해함에 있어예수의 삶과 가르침 (산상수훈 등)을 따라 사는 것이 너무나도 중요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재세례신앙의 교회는 “자유교회(Free Church)”라고도 불리었는데, 이것은 성경말씀에 따라 세상적 권세에 충성을 맹세하지 않기 때문에 교회와 국가권력과의 분명한 구분을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 교회는 “전통적 평화교회(Historic Peace Church)”로 인식되어 왔는데, 이것은 사랑의 윤리와 비폭력적 갈등해결을 실천하기 때문이다. 아나뱁티스트를 뿌리로 하는 그룹에는 크게 메노나이트 (Mennonites), 아미쉬(Amish), 후터라이트(Hutterites)가 있다. 메노나이트는 16세기 네덜란드 재세례신앙운동의 지도자였던 메노 사이먼스(Menno Simons)에서 유래한 이름이다. 


아나뱁티스트 분류 I - 첫 신자의 (성인) 세례이후 (1525년)
  • 1529년 - 후터라이트(Hutterite) - Jakob Hutter, 상인, 나중에 목사가 됨
  • 1535년 - 메노나이트(Mennonite) -메노 사이먼스, 네덜란드의 카톨릭 사제
  • 1693년- 아미쉬(Amish)- , 아미쉬 메노나이트, 나중에는 아미쉬로만 불림
  • 1708년 - 브래드런 (Brethren)
    • Anabaptism과 Pietism을 결합(by Alexander Mack Jr)
    • the Church of the Brethren 이란 이름으로 독일 Schwarzenau 에서 시작
    • 메노나이트가 역사적인 아나뱁티즘으로부터 교리와 생활면에서 멀어졌다고 판단, 메노나이트와 연합하기를 거부함
  • 19세기 메노나이트의 갱신운동을 벌인 사람들 -BIC (Brethren in Christ)
아나뱁티스트 분류 II - Hyphenated Anabaptist: (Anabaptist-Anglican, Methodist, Presbyterians...)
  • 아나뱁티스트-성공회, 감리교, 장로교 등
  • 전통교회가 아나뱁티스트 정체성과 동일시하는 부분 -제자도, 평화, 공동체
  • 전에는 성공회 역시 사회 현실적 관점에서 아나뱁티스트와는 반대 입장에 서 있었는데 지금은 우리도 아나뱁티스트 신학의 여러 특징들 특히 평화와 정의에 관한 입장이 같음을 발견합니다. - 영국 성공회 신학대학원 세미나에서 있었던 일
  • 라틴 아메리카에서 공동체를 이루며 사는 사람들, 사회정의를 외치는 사람들
  • 1980년대에 들어 아나뱁티스트, 비폭력의 윤리와 평화신학적 삶을 지지하는 교회들이 더욱 생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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